[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서울 무대서 남한 가요… 北 달라진 ‘음악 정치’


 
현송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장(앞줄 가운데)이 지난 11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백두와 한나(한라)도 내 조국’이라는 북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현 단장은 “단장인 제 체면을 봐서 다른 가수들보다 조금 더 크게 박수를 부탁드린다”고 해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국민일보DB


南 찾은 삼지연관현악단
서구식 의상 입고 팝송까지

김정은, 김정일보다 개방적
“문화 수준 높아진 주민들
통제 위해 불가피” 분석도

南·美와 교류 준비됐다는
대외적 신호 담겼지만
평화 메시지로만 볼 순 없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경기장 밖에서 더욱 극적이고 급박하게 돌아갔다. 드라마의 주역은 북한이었다. 반 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한 단일팀 제안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들이 단일팀을 수락하고 예술단을 보내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심지어 김일성의 혈육이 특사로서 휴전선을 건너는 역사적인 순간까지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40여일 만에 진행됐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 넘게 공들인 신경전 끝에 성사된 과거 남북교류 이벤트와 비교할 때 신속함이 돋보인다.

하지만 그만큼 준비 기간도 짧았을 것이다. 지난 8일과 11일 강원도 강릉아트센터와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가진 삼지연관현악단은 기존 단체가 아니라 남한 공연을 위해 급조된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였다. 공연 프로그램도 북한 창작곡 위주로 구성된 과거와 달랐다. 다소 과감하게 보이는 서구식 의상과 무대와 조명 아래 북한 음악인들은 북한 노래의 두 배수가 넘는 남한 가요들을 열창했으며 20분이 넘는 서양음악 메들리에는 ‘백조의 호수’ ‘카르멘’ 같은 서양 고전음악 레퍼토리에서부터 ‘오페라의 유령’ 같은 뮤지컬 넘버, 심지어 팝송까지 삽입돼 있었다.

이런 레퍼토리들을 갑자기 결정된 남한 공연 때문에 단기간에 완성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선입견에서 오는 착각이다. 음악 애호가였던 김정일이 내부 단속과 민족주의 강화를 위해 음악을 이용했다면 젊은 김정은은 아버지보다는 개방적인 방식으로 음악을 정치에 도입해왔다. ‘음악 정치’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2012년 모란봉악단 시범 공연은 그 출발부터 파격적이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전자 악기를 들고 춤추는 미소녀들의 외모뿐이 아니다. 프로그램 중에는 그들이 제국주의라 배척하던 미국 팝송은 물론 할리우드 레퍼토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무대 뒤편 화면에는 ‘톰과 제리’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고 가수들 사이사이로 디즈니 캐릭터 인형들이 앙증맞게 뛰어다녔다.

이번에 서울에서 연주한 곡들 또한 준비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서양음악 메들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곡들이 신년 경축음악회 등에서 이미 자주 연주해온 모란봉 악단의 고정 레퍼토리였기 때문이다. 남한에 파견되었던 북한 예술단은 평양에 돌아간 뒤 가진 남한 방문 기념 공연에서도 남한 노래를 평양 시민들 앞에 선보였다.

김정은 시대 음악 정치의 변화에 대해 문화 수준이 높아진 북한 주민들의 통제를 위해 불가피한 포용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음성적으로 최신 K팝과 한국 드라마를 접하는 북한 주민들을 철지난 ‘톰과 제리’나 ‘오페라의 유령’으로 달랠 수는 없다는 것은 북한 당국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들의 노래는 대외적인 메시지로서 의미가 더 크다. 북한은 지금 남한은 물론 미국과도 교류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북한의 변화를 순진하게 평화의 메시지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핵무기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무사가 건네는 꽃을 앞에 두고 청와대는 그 어떤 정권보다도 어려운 숙제에 직면한 듯 보인다. 투구 속에 감춰진 무사의 표정을 읽어야하고 꽃을 받아들려니 시어머니 격인 미국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와 달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정서적 공감대가 거의 없는 신세대들의 반대는 연로한 보수 세대의 반대보다도 통일을 가로막는 더 높은 장벽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오랫동안 말라있던 남북 교류라는 펌프에 북한이 먼저 마중물을 부어넣었다. 평화에 목말라하는 우리 모두의 갈증을 해소할 물을 이번 정부가 과연 끌어올릴 수 있을지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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