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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야사] 기록 단축하려 썰매날 데웠다?

루지 선수 엔데를레인에 얽힌 사연

1968년 기대 모으다 실격 판정 받아
심판진 “썰매서 수상한 소리 났다”
선수측, 결백 주장하고 나섰지만
기록 인정 안되고 재경기 못 치러
동·서독 냉전 맞물려 갈등 커지기도


원래 동독의 핸드볼 선수였던 오르트룬 엔데를레인(75)은 루지로 종목을 바꾼 뒤 탁월한 기량을 드러내며 ‘가장 완벽한 여자선수’라고 불렸다. 1961년까지만 해도 핸드볼 골키퍼였던 그는 루지 선수로서 65년 세계 챔피언이 됐다. 68년 1월 알파인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같은 해 2월 열리는 그로노블 동계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이 유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모으던 엔데를레인은 3차 예선을 마친 뒤 돌연 실격 판정을 받았다. 심판진은 당시 결승선으로 들어온 엔데를레인의 루지에서 수상한 ‘쉬잇’ 소리가 났다고 밝혔다. 가까이서 살펴보자 썰매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고도 했다. 썰매를 조사한 심판진은 결국 엔데를레인이 썰매 밑바닥의 러너(썰매날)에 불법적으로 열을 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썰매날 위에 눈뭉치를 올려 봤더니 금세 녹아버리더라는 게 조사 결과였다. 심판진은 얼음판과 썰매의 마찰력을 줄여 기록을 단축하려고 썰매를 데웠다는 분석까지 곁들였다. 엔데를레인 등 동독 선수들이 레이스를 마치자마자 빨리 현장을 떠나려 했다는 것도 일종의 정황 증거가 됐다. 이들은 억울하다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엔데를레인은 기록을 인정받거나 다시 경기를 치를 수 없었다.

엔데를레인의 실격은 ‘냉전’이라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확대 해석되기도 했다. 하필 엔데를레인의 실격은 서독 선수의 메달로 이어졌다. 동독 사람들은 엔데를레인을 실격 처리한 것이 ‘자본주의의 음모’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눈뭉치를 올려 썰매를 조사했던 심판진에 대해서는 유치하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반면 서독 언론은 엔데를레인의 우스꽝스러운 속임수를 스포츠정신과 맞물려 대서특필했다.

실제로 엔데를레인이 음흉한 마음을 먹고 썰매날을 데웠는지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엔데를레인이 결백 성명을 발표하고 동독과 서독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는 가운데 국제루지연맹은 사건의 재평가를 거부했다. 냉전의 시대는 끝났고, 결국 엔데를레인의 실격은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2006년 비밀이 해제된 ‘슈타지 문서’(동독 정보기관 슈타지가 수집·기록해 보관한 문서)에는 엔데를레인의 실격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엔데를레인의 썰매를 조사했던 국제루지연맹 고위 관계자는 오스트리아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십년이 지나 공개된 기록에 엔데를레인의 ‘썰매날 데우기’ 사건이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엔데를레인은 70년부터 90년까지 동독 올림픽위원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강릉=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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