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순탄치 않았던 연애… 작품서 적나라하게 드러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젊은 시절 완성한 ‘남녀’. 이 작품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긴장감이 녹아 있다. 필자 제공
 
자코메티가 ‘남녀’를 만들던 시기에 사귀었던 플로라 마요를 조각한 작품. 필자 제공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항상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 자신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혁신했다.

자코메티는 인상파 화가였던 아버지 지오반니 자코메티로부터 전통적인 회화를 익혀 예술의 단단한 기반을 만들었다. 그 기반을 만드는 일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해 나가는 데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것은 다음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하지만 이 기반이 자신이 안주할 아지트는 아니었다.

자코메티가 아버지의 예술세계를 떠나 둥지를 튼 스위스 제네바의 공예학교와 프랑스 파리의 그랑드 쇼미에르는 그의 천재성을 자극하는 공간이었다.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소위 첨단 예술을 가르치던 부르델은 경계에 있는 예술가였다. 부르델은 전통적인 조각에 근대적인 감수성을 보태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한 오귀스트 로댕의 제자였다. 부르델은 당시 조각가를 꿈꾸는 야심찬 젊은이라면 누구나 찾아가 흠모하고 싶은 당대 최고 조각가였다.

하지만 자코메티는 부르델의 제자로 남을 생각이 없었다. 자코메티가 보기엔 부르델도 과거에 경도된 조각가였다. 미지의 예술을 탐험하는 혁신가는 아니었다.

조각상 ‘응시하는 머리’는 자코메티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도약하기 직전의 작품이었다. 자코메티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 이전의 예술작품, 즉 에게해의 키클리데스 예술과 이탈리아의 조각, 그리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원시 부족들의 예술, 그리고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예술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모색했다. 그는 수천년 동안 향유된 예술 작품을 재료로 삼아 자신에게 필요한 예술의 발판을 조각했다.

자코메티는 1929년 한 프랑스 사상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조르주 바타유. 바타유는 인간의 모습을 추상적이면서 기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바타유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맹인이 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자였다.

그는 인류가 짐승에서 인간으로 가는 여정 사이에 예술의 기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짐승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금지구역(interdiction)’을 넘어 무언가를 ‘위반하는’ 행위를 통해 문화를 구축했다고 판단했다.

바타유는 아방가르드 예술, 즉 전위예술의 돌격 대장이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프랑스어로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소수의 군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아방가르드는 사회가 전통적이며 관습적으로 정의한 예술을 부정하고, 참신한 예술을 구축하기 위해 금기시되었던 영역들, 특히 성적인 영역들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예술이다. 이러한 예술 작업을 벌이는 작가들은 기성문화의 경계를 허문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바타유는 1929년 ‘도퀴맹(Documents)’이라는 예술 잡지를 발간했다. 이듬해까지 이 잡지는 15호나 나왔다. 파리의 미술상이었던 조르주 윌당스텡이 출판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타유는 자신의 잡지를 ‘기성 이념들에 대한 군대’라고 규정했다. 이 잡지에는 상이한 주제와 이미지를 과감하게 대비시킨 작업물이 담겼다. 예를 들어 한 호에서는 재즈와 고고학, 성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커다란 발가락을 찍은 사진 등을 모아 피카소에게 헌정했다. 바타유는 주류 예술가들이 시도하지 않은 예술과 도덕의 모든 위계질서의 전복을, 모든 형태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표현을 지향했다.

자코메티는 바타유의 추종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자코메티는 전후좌우가 모두 투명하게 보이는 조각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조각은 정적인 추상이 아니라 폭력적이며 성적인 주제를 담고 있었다. 관람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바타유의 ‘도퀴맹’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인류학자 예술사학자 비교종교학자를 한데 모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아방가르드 문인들의 집합소였다. 바타유는 1929년 4월호에 ‘학문 세계의 말’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이전 학문 세계에서 차용하는 연구방법의 허상과 그것이 갖고 있는 이상한 폭력을 폭로했다.

바타유는 이 에세이에서 고대 켈트족이 거주한 ‘골(Gaul)’에서 발견한 동전들을 소개했다. 고대 동전을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했던 바타유는 이 동전들에 등장하는 말의 모습이 자신들이 다른 작품에서 관찰한 말의 모습과 다르다고 했다. 동전 속 말들은 고대 그리스 예술에 등장하는 ‘숭고한’ 이미지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의 이상주의를 발판으로 진화한 서양 문명은 현실이라는 삶의 모순을 감추려고 했다.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을 관찰할 때 그 안에는 숭고한 무언가가 있기 힘들다. 바타유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근대를 넘어 현대에 접어드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서양의 문명은 환상이 만들어낸 이상주의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는데, 그 안에는 일관된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바타유는 골에서 발견된 동전, 그 안에 있는 말에 담긴 야만적인 이미지가 더 설득력을 띠고 진실한 것이라고 했다.

자코메티는 바타유의 소설 ‘눈의 역사’와 ‘도퀴맹’을 탐독했다. 그는 1966년 죽을 때까지 이 책과 잡지들을 고스란히 간직할 만큼 각별하게 여겼다. 그는 바타유가 ‘학문 세계의 말’에서 주장한 내용에 공감했다.

자코메티의 고향 스위스 스탐파는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된, 보수적인 지역이었다. 자코메티는 어머니 아네타가 전수해준 칼뱅의 보수적인 개신교 신앙 세계에서 벗어나 바타유가 제시한 ‘금지된 지역’의 ‘위반’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자코메티는 파리라는 쾌락의 도시에서 ‘금지된 지역’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지역은 바로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클럽 ‘스핑크스’였다. 스핑크스는 ‘위반’이 적극적으로 장려되던 파라다이스였다. 이곳 여성들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전까지 자코메티에게 파라다이스는 알프스 계곡이었는데, 스핑크스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됐다.

자코메티는 미국 덴버에서 예술을 공부하러 파리로 온 플로라 마요를 1925년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됐고, 1933년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질투와 오해로 순탄치 않았다. 자코메티는 자신과 마요의 관계를 평온한 ‘응시하는 머리’와는 다른, 바타유의 사상을 수용한 ‘남녀’를 통해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자코메티는 남성을 공격적으로, 여성은 방어적이면서 수동적인 형태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는 마요와의 순탄치 않았던 관계가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오른쪽 조각이 여성이다. 이것은 그가 만든 ‘숟가락 여인’의 이미지를 연상케 만든다. ‘남녀’의 여인은 움푹 파져 있다. 거의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빈 물체처럼 보인다.

왼쪽 조각은 남성을 상징한다. 활에서 튕겨져 나온 화살 같은 모습이다. 두 조각을 같이 바라보면, 여성이 남성의 위협에 자신을 방어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왼편에 살짝 휘어진 곡선과 그 곡선 중간을 관통해 오른편 여성의 중앙으로 달려가는 직선이 인상적이다. 움푹 파인 곳을 향하는 직선의 끝은 날카롭다.

화살의 끝과 여성의 둥그런 부분이 만나기 직전의 어떤 지점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 작품에는 남녀 간에 존재하는 공포와 공격성이 담겨 있다.

자코메티는 이런 감정들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상징하는 직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자코메티는 남녀라는 개념을 성적인 표식 없이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남녀의 폭력적인 관계를 묘사했고, 이를 통해 남녀의 성적 정체성을 조각했다. 이 당시 자코메티가 발견한 남녀에 대한 묘사는 자신이 경험한 남녀 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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