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스무 살, 집 떠나는 21세기 소녀들


 
영화의 후반, 태희(배두나)는 지영(옥고운)과 함께 떠나기 위해 고양이 티티를 온조(이은주)와 비류(이은실)에게 맡긴다(위 사진). 함께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다섯 명의 동창생들. 왼쪽부터 지영 비류 혜주(이요원) 태희 온조. 영화사 제공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 영화사 제공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장소의 공기다. 차가운 겨울, 매서운 바람, 항구의 스산한 분위기, 그리고 깔깔거리는 청춘들의 웃음소리.
 
정재은 감독


바람이 매서운 겨울, 인천 여객선 선착장에서 찜질방 전단지를 돌리던 태희(배두나)와 지영(옥고운)은 다리 위를 걷고 있다. 갑자기 건너편 도로에서 한 여자가 무언가에 홀린 듯 이들을 향해 걸어온다. 행색을 보건대 노숙자인 것 같고, 눈빛을 보건대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것 같다. 여자는 말없이 태희와 지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둘은 뒷걸음을 치면서도 모호한 표정으로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 지영은 그녀처럼 될까봐 무섭다고 말한다. 그러자 태희는 담담하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답한다. 그녀를 따라가 보고 싶다고, 얼마나 자유롭게 살지 궁금하다고.

괴이한 여인의 등장으로 균열되는 이 짧은 장면에 ‘고양이를 부탁해’ 속 청춘들의 내적 초상이 담겨있다. 이들은 경제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해 집 없이 거리에 내버려질지 모르는 미래를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집 없이, 편견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삶을 동경한다. 삶의 조건을 절실하게 염려하면서도 삶의 미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들. 이들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이제 막 스무 살의 문턱에 선 여자들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전에는 본 적 없는 고민이고 형상이었다. 구체적인 개별성을 갖춘 여자 캐릭터들은 누구도 전형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으며, 서울이 아니라 인천에 살았다. 그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자리에서 중심인물이었다. 학교라는 제도를 떠나 사회에 발을 내디딘 다섯 명의 여고 동창생들의 일상과 관계가 특정한 사건으로 모이지 않고도 고르게, 입체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태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찜질방에서 일을 한다. 뇌성마비를 앓으며 시를 쓰는 친구 주상을 대신해 종종 타이프를 쳐 준다. 선원모집공고를 유심히 보며 언젠가 집을 떠나 자유롭게 살 날을 꿈꾼다. 그녀는 궁금한 것들이 많아 보인다. 혜주(이요원)는 졸업 후 증권사에 취직을 했다. 취직 후, 서울로 이사를 하고 ‘중심부’의 삶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의 그녀는 복사와 커피 심부름을 담당할 뿐이다. 부모는 이혼을 했다. 스스로 세상물정에 밝다고 생각하며 더러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에 남몰래 좌절한다. 지영은 동창들 중 가장 가난하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무너지기 직전인 낡고 오래된 집에서 산다. 유학을 가서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만, 먹고 살기 위해 식당에서 일하는 처지다. 그런 처지 때문에 그녀는 줄곧 방어적이고 외로워 보인다. 온조(이은주)와 비류(이은실)는 화교 쌍둥이 자매다. 그들은 커다란 가방 속에 직접 만든 액세서리들을 넣고 다니며 노점에서 장사를 한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들의 쾌활함이 이들에게는 있다. 졸업 후 다섯 친구들은 인천 부둣가에서, 락카페에서, 서울의 쇼핑몰에서 종종 만나고 만나지 못할 때는 휴대전화로 소통한다.

그간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서사 속에서 교환되고 대상화되어 온 여자들의 상투적이고 따분한 이미지 같은 것은 여기 없다. 영화의 포스터에는 “스무 살, 섹스 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라는 문구가 당당하게 씌어있다. 이들은 백마 탄 왕자님과의 환상을 꿈꾸지도 않는다.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에게 “너를 떠난다고 해서 너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야”(태희)라고 성숙하게 화답할 줄도 안다. 그러니까 ‘고양이를 부탁해’는 같은 해 개봉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신드롬을 일으킨 ‘친구’(감독 곽경택)와 동시대의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는 세계다. 둘 사이의 정서적, 시대적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친구 아이가”라는 말을 시종일관 내뱉는 ‘친구’에서 친구는 실은 폭력과 배신의 결정체에 불과하다. 이 세계에 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다. 남자들의 서사를 중심에 둔 당시 많은 작품들이 그랬듯, 이 영화 또한 과거로 회귀한다. 어른이 되어 불가피하게 더러워진 지금과는 달리 과거는 순수했다고 강변한다. 그 시절은 향수의 대상으로 미화된다. 그 과정에서 첫사랑으로 등장하는 여자들은 성적으로 착취되고 금세 사라져버린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친구’처럼 의리를 내세우며 호들갑스러운 화법을 경유하지 않는다.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에 놓인 여자들은 우리들 중 하나처럼 유별나지 않고 그들이 품고 있는 고민은 우리들의 그것처럼 극적이지 않다. 그들의 관계는 공동체라는 말도, 연대라는 말도 거창하게 느껴질 만큼 일상적이고 소박하다. 이 영화가 가진 힘, ‘고양이를 부탁해’에는 있고 ‘친구’에는 없는 것은 바로 그 평범함 속에 살아있는 현재성이다. 혹은 집요하게 현재를 바라보는 태도다.

이 영화가 불러온 현재는 작위적인 설정이나 유형화된 인물이나 회상의 장치를 통과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내면에 담긴 생각들을 인위적으로 끄집어내지도 않는다. 대신 장소의 풍경과 정서, 인물들이 처한 상황, 그들이 짓는 표정을 긴 호흡으로 바라본다. 그때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주변인 혹은 주변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다. 학벌위주 사회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않은 스무 살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가난과 싸우거나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한다. 이를테면 지영은 변변한 자격증도 없고 신원을 보증해 줄 부모도 없는 탓에 면접을 통과하지 못한다. 일의 종류를 가릴 형편이 아니다. 혜주는 겨우 증권사에 입사하지만, 존경하는 상사로부터 “평생 잔심부름만 하는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 수는 없지 않니”라는 충고를 듣는다.

아무리 서울로 이사를 와도 주변인으로서의 위치가 바뀌지는 않는다. 사회는 그들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어떤 조건을 소유하는지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인물들은 그러한 불합리하고 억울한 상황에 투사처럼 맞서 싸우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존감을 포기하고 활기를 잃거나 냉소적으로 둔감해지지도 않는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인물들이 세상과 스스로에게 가지는 민감함을 뭉뚱그리거나 놓치지 않고 사려 깊게 응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민감함 때문에 이들에게는 하고 싶은 것들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 있다. 그 목록은 대체로 기성세대의 언행과 관련된다.

요컨대 태희가 가장 참을 수 없어 하는 건 아버지의 어떤 태도들이다. 그는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지 앞가림도 못한다”며 딸을 힐난한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에게 메뉴의 종류를 묻는 태희를 무시하고 제일 잘 팔리는 음식을 달라고 말한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언제나 의기양양하다. 태희에게 그런 아버지의 행동은 폭력과 다름없다. 지영의 경우는 더하다. 집 천장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지영은 집주인에게 거듭 전화를 하지만, 그는 이사를 가라는 말만 반복한다. 지영이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은 주변에 없다. 집주인의 무책임함 때문에 결국 집은 무너지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두 죽는다.

영화가 인천 곳곳에서 포착한 공간의 분위기는 인물들의 이러한 상태와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다. 서울이 아닌 곳, 정착민들보다 이주민들이 더 많은 곳, 비행기와 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 스산한 항구와 거대한 공장지대가 마주보는 곳. 그곳에는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과 이제 막 새롭게 개항된 공항이 공존한다. 어딘지 통속적이고 오래된 풍경 속에서도 무언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쇠락한 역사와 미지의 미래가 동시에 작동한다. 쓸쓸한 활기가 이 세계를 감싼다. 인물들이 시시각각 서로에게 보내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화면 한구석에서 한 글자씩 세련되게 등장했다 공허하게 사라질 때의 감흥처럼 말이다.

정재은 감독이 밝혔듯, 영화가 고집스럽게 호흡하는 인천의 공기는 인물들이 공유하는 “유목민”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것은 제목에 등장하는 동물이자,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작은 고양이의 기질과도 닮았다. 조용히 웅크렸다가도 이내 저만치 발걸음을 옮긴다. 그들에게 집은 안정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떠나고 싶은 곳이다. 상징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영화의 후반, 갈 곳 없는 지영과 함께 어딘가로 떠나려는 태희는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월급을 훔친 뒤,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에서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도려낸다. 지영이 가족을 잃었다면 태희는 가족으로부터 담대히 퇴거한다. 계절은 바뀌고 어느덧 둘은 공항에 나타난다.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하는 마지막 장면이 이어진다. 이들이 그 비행기를 탔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떠나는 비행기 위로 커다란 글자가 명징하게 새겨진다. “굿 바이(Good Bye).” 영어로 된 이 말은 묘한 해방감과 슬픔을 동시에 안긴다. 아무 미련도 없이, 다시는 이 나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확고한 선언일까. 21세기 초입에 한국을 떠난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최근 몇 년간 한국 독립영화에 등장하는 10, 20대 여자들의 세계는 관계도, 미래도 체념한 상태에서 시작되곤 한다. 집은 떠나고 싶은 곳이 아니라, 애초 가질 수 없는 곳이다. 집으로부터 버려진 그들은 길 위에서 목숨을 걸고 버틴다. 임금 착취는 물론이고 온갖 폭력에 노출된다. ‘헬조선’에서 ‘흙수저’로, 여성을 겨냥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 곳에서 어린 여자로 사는 현실의 어둠과 적나라함만이 영화들을 채운다. 태희와 지영이 다리 위에서 마주쳤던 낯선 여인의 불길한 그림자가 이들 영화에서는 눈앞에 다가온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결말을 되돌아보면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다섯 명의 청춘들에겐 출구가 있었다. 유목민의 낭만도 허락되었다. 적어도 그들은 바깥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 정재은 감독
아이·어른 경계에 선 이들, 그들의 불안·활기 관심 갖고 들여다봐


1969년에 태어난 정재은(사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기생이다. 1999년에 만든 졸업영화 ‘둘의 밤’으로 영상원영화제 최우수상을, 같은 해 제작된 단편 ‘도형일기’로 서울여성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장편 데뷔작인 ‘고양이를 부탁해’는 일찍이 한국영화사에서 본 적 없는 스무 살 여자들의 성장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와 로테르담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국내외 영화제의 여러 부문에서 수상하거나 특별 언급되었다. 하지만 관객동원에 실패하고 극장에서 금세 사라지자, 입소문을 타고 다시 보기 운동이 일어나 재상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스무 살 여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었다면, ‘태풍태양’(2005)은 인라인 스케이트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남자들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의 밤’부터 ‘태풍태양’까지 정재은은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놓인 이들의 불안과 활기를 꾸준히 들여다보며 필모그래피를 쌓아갔다.

2011년에는 뜻밖의 영화로 돌아왔다. 건축가 정기용의 마지막 삶을 다룬 ‘말하는 건축가’는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다. 몇 년 뒤 공개된 ‘말하는 건축 시티: 홀’(2013)은 서울시 신청사를 둘러싼 논란을 중심으로 관련자들의 인터뷰와 완공까지의 과정을 촘촘하게 담아냈다. 건축과 다큐적 형식에 대한 관심은 한국 초창기 아파트 단지들의 역사와 삶의 조건을 들여다보는 ‘아파트 생태계’(2017)로 이어졌다.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와 한국배우 김재욱이 연인으로 분한 멜로 ‘나비잠’(2017)이 그의 최신작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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