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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영웅에게 듣는다] 빙속 제갈성렬 “올림픽은 내게 인내를 가르쳤다”

지난달 서울 노원구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제갈성렬 의정부시청 빙상단 감독이 자신의 스케이트화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제갈 감독이 현역 시절이던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출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 대한체육회 제공


<6> 빙속으로 3회 출전 제갈성렬 감독

동계스포츠 불모지 같은 환경서
메달 꿈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
릴레함메르올림픽 한 달 반 전
발목 부상 입었지만 출전해 완주
신앙생활하며 많은 도움 받기도
“이상화, 감격의 3연패 일굴 것”


“하나 둘 하나 둘.”

제갈성렬(48) 의정부시청 빙상단 감독은 자신의 상징과 같은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외치면서 선수들 지도에 여념이 없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 SBS 스피드스케이팅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에너지 넘치는 샤우팅도 여전했다. 선수들은 제갈 감독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빙판을 누볐다.

3회 연속 동계올림픽 무대를 밟은 제갈 감독을 최근 서울 노원구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만났다. 1990년대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이었지만 올림픽 메달을 한 번도 목에 걸지 못한 것은 제갈 감독에게 한으로 남아 있다. 그는 “올림픽 무대를 밟는 것은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나의 꿈이었다”며 “1992 알베르빌·1994 릴레함메르·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모두 제게 좌절의 올림픽이었지만 동시에 깨달음을 준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나섰을 때 한국은 동계스포츠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갈 감독은 “당시 외롭고 고독감을 참아내며 메달이라는 꿈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고 기억했다. 첫 올림픽 무대가 메달 없이 쓸쓸하게 마무리 됐지만 그는 “그래도 열심히 하면 가능하겠다는 소중한 자신감도 얻었다”고 말했다.

절치부심하며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한 제갈 감독은 2년 당겨져 열린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준비에 매진한다. 그는 “대학생이었는데도 친구와 함께 편안하게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는 등 개인적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했다”며 “교회, 학교 선수촌만 왔다 갔다 하며 운동만 했고 열정적으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준비했다”고 회상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1993-1994시즌 국제빙상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1차 대회에서 5위에 오르는 등 메달 전망도 밝았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큰 부상에 발목이 잡힌다. 올림픽 테스트 이벤트로 릴레함메르에서 열린 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2차 대회에서 발목이 부러졌다. 그는 “94년 2월에 열리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한 달 반 남겨둔 시점이었는데 속도를 내야 하는 구간을 지날 때 얼음이 파인 곳에 스케이트날이 들어가면서 넘어졌다”며 “바깥으로 튕겨나갔고 곧 일어나려고 보니 발목이 서지 않고 한쪽으로 누웠다”고 당시 상황을 담담히 전했다. 이어 그는 “레이스를 간신히 마친 후 병원에 가니 복숭아뼈는 조각이 나는 등 골절로 진단을 받았다”며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믿기지 않았고 수술까지 해야 한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제갈 감독은 깁스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와 하염없이 울었다. ‘올림픽만 생각하고 노력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라는 원망도 들었다. 그럼에도 동계올림픽 출전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대한빙상경기연맹 측에서는 부상으로 출전이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그는 태릉선수촌에서 물리치료를 담당하던 신기문씨의 도움과 불굴의 의지로 다시 스케이트를 신었다. 그는 “6주 동안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으나 3주째에 풀어 달라고 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재활을 계속 하고 연습도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의지를 가지고 릴레함메르로 떠났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스케이트를 신었을 때의 통증은 극심했다. 그래도 그는 끝내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완주를 해냈다. 40여명 중 20위권에 들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안 된다고 했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고 아름다운 레이스를 마쳤다”며 “(메달은 못 땄어도)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많은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의지로 완주를 해낸 것 그 자체가 올림픽 정신 아닌가”라며 “경기뿐 아니라 삶에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와 ‘인내해야 한다’라는 깨달음을 줬다”고 덧붙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제갈 감독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부모님의 응원 기도가 저를 지탱해준 힘이었다”며 “선수 생활 중에도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후 1996 세계종목별 선수권대회 스피드스케이팅 1000m 동메달, 1996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스피드스케이팅 500m 금메달 등을 목에 걸며 부상을 털고 기량을 회복했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당시 새롭게 나온 클랩 스케이트(탈착식 스케이트) 적응 문제로 부진했고 1999년 이후 선수생활을 마쳤다. 어찌보면 올림픽에서 영광의 시간은 없었지만 많은 배움을 얻은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감을 갖기를 희망했다. 그는 “운동선수로서 한 번쯤은 좌절을 겪겠지만 후배들이 그것조차 즐기길 바란다”며 “좌절해도 박차고 일어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올림픽을 앞둔 후배들에게 제갈 감독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올림픽 3연패를 노리는 이상화에 대해서는 “이상화가 쫓기는 고다이라 나오(일본)보다 심리적으로 더 나을 것이고 올림픽 2연패의 저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매스스타트에 최적화된 이승훈도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봤다. 의정부시청팀에서 지도한 제자이자 ‘포스트 이상화’로 불리는 김민선이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깜짝 활약을 보여줄 수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또다시 마이크를 잡고 해설위원으로 나서는 제갈 감독은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국민이 함께 외치며 응원해주신다면 선수들의 성적도 좋을 것이고,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도 이루어질 것”이라며 국민들의 많은 성원을 당부했다.

▒ 제갈 감독은
현역 시절 ‘연습벌레’ 해설위원으로 활동


현역 시절 ‘연습벌레’로 불리던 제갈성렬 의정부시청 빙상단 감독은 지도자, 해설위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열정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최초의 동계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김윤만과 함께 1990년대 한국 빙속의 쌍두마차로 활약했다.

3회 연속 동계올림픽 무대를 밟은 제갈 감독은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엔 지도자로도 활약한다. 2003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 때는 이규혁의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2관왕을 코치로서 이끌었다. 학업에도 매진,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지만 빙상계를 위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재 의정부시청 빙상단에서 후배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하며 우수 선수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

사진=최종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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