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가야금 명인’ 동시대와 공감의 지평을 넓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지난해 9월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국악시리즈’ 연주회에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서울 경기중학교에 다니던 황병기는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 피난 중이었다. 그곳에는 부산 무용계의 대부였던 추강 김동민이 운영하던 고전무용연구소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 연구소에서 흘러나오는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 역사 속에만 존재하고 한 번도 실물로 본 적이 없는 악기 가야금은 그렇게 황병기의 인생에 소리로 먼저 찾아들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된 황병기는 방과 후면 국립국악원을 오가며 가야금을 배웠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로서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었지만 대학 2학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제도권 음악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국악인으로 남게 됐다. 물론 이는 남들보다 먼저 가야금의 미덕을 발견한 황병기의 심미안에서 비롯된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야금 명인’이나 ‘국악인’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음악 세계를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창작곡을 주입하며 가야금을 과거의 유물로서 다루지 않고 동시대는 물론 미래의 숨결을 불어넣었으며 심지어 한국뿐 아니라 세계로 악기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황병기의 음악적 스케일은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그의 데뷔 음반은 65년 한국보다 미국에서 먼저 나와 ‘현대인의 정신적 해독제’라는 극찬을 받았다. 최대 히트작이자 스테디셀러인 ‘침향무’는 74년 한국이 아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초연됐다. 해외 음악계가 그의 가야금 소리를 긍정했던 이유는 그것이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여서가 아니라 모두가 공감하는 동시대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뼛속까지 파격을 추구하는 현대 예술가였다. 황병기는 매년 정월 초하루면 의식처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들었다. 59년 친구네 집 오디오에서 이 곡을 듣고 ‘신천지가 열리는 것’을 경험한 뒤 그는 매년 이 곡으로 한 해를 시작해왔다. 60년대 이미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존 케이지, 백남준과 소통하며 세계 문화의 메인스트림에 깊숙이 개입해있던 그는 전위적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관객 중 한 명이 극단적인 히스테리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간 해프닝으로 더 유명한 그와 홍신자의 콜라보레이션 ‘미궁’은 황병기의 대담한 음악세계에서 아주 미미한 파편에 불과하다. ‘침향무’는 처음부터 한국이 아닌 범아시아를 염두에 둔 작품이었고, 이런 그의 창작 스케일은 죽을 때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동서 문물의 통로를 염두에 두며 ‘비단길’을 작곡했고, 심지어 이란의 고대도시 ‘하마단’도 그의 휘모리장단에 녹아들었다.

이 모든 그의 업적은 ‘정통성’과 ‘보존’이라는 도그마에 집착해 전통예술을 박물관의 박제처럼 다루던 한국 국악계의 관행에 역행하는 시도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문화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와 소통하고, 변화하고, 진화를 거듭해야 생명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음악세계로 증명했다.

90년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참여했던 그는 남북한 전통음악의 이질적인 발전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엄하게 죽비를 들었다. “우리 문화가 그만큼 다양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지. 왜 문화를 획일화하려고 들어.” 며칠 뒤 북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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