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자코메티에 맞닿은 조각

김종영 ‘전설’, 철, 1958. 65×70×77㎝. 김종영미술관 제공


무언가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철판들이 이어져 직립의 구조물이 됐다. 굵은 철사며 쇠사슬도 보인다. 크기도 제각각, 형태도 제각각인 쇠붙이를 용접해 붙이다 보니 거칠고 투박한 질감이 도드라졌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켜켜이 쌓인 듯 신산스럽다. 두 개의 수직기둥 위로 삼단의 처마가 얹혀 조각은 문(門)의 형상을 이뤘다. 어느 집 솟을대문인 듯싶다. 그런가 하면 세찬 비바람 속에 표표히 서있는 고목 같기도 하다. 가늘고 위태로운 선과 삐쩍 마른 형태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자코메티가 인간 실존을 탐구하며 석고로 작업했다면 이 조각을 만든 우성 김종영(1915∼82)은 철공소에서 구해 온 자투리 쇠붙이로 한 점의 추상조각을 완성했다. 1958년 작품이니 작가의 초기작이다.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들쑥날쑥한 비정형 재료’의 특징을 살려가며 풍부한 결을 품은 조각을 만들어낸 솜씨가 범상치 않다. 매끄러운 조각에선 느낄 수 없는 묵직함이 넘실대고, 겨레의 아픈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가가 붙인 이 작품의 타이틀은 ‘Work58-2’였다. 그러나 우성과 절친했던 예술철학자 박갑성이 ‘전설’로 명명하며 ‘전설’로 불리고 있다. 휘문고보 동문으로 도쿄 유학도 함께했던 박갑성은 조각을 보자마자 “영락없이 당신 창원집 대문이구먼. 사미루(四美樓) 말이야. 네 가지 좋은 시절을 담았으니 전설이라 하면 되겠네”라고 했다. 고향집 솟을대문을 온갖 풍상을 견뎌낸 수목으로, 역사 앞에 직립한 인간으로 표현한 김종영은 이후 일평생 추상조각에 헌신했다. 일부러 깎거나 새기지 않고, 재료의 본성을 살린 ‘불각(不刻)의 미’를 추구했던 작가의 통찰은 오늘 우리 조각의 탄탄한 기둥이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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