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계 배우,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지난해 1월 영국 런던 프린트하우스 극장 앞에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연극 ‘죽은 사랑 속에서’에 백인만 캐스팅된 것에 항의해 아시아계 배우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페이퍼강 시어터 페이스북


아시아 캐릭터에 백인 캐스팅하는
‘화이트워싱’ 관행 영국서 만연
외모 비하하는 분장도 비판 받아
차별 논란에 공연 취소된 사례도
BBC, 무대 속 아시아계 차별 분석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비백인, 특히 아시아인 캐릭터에 백인을 캐스팅하는 이른바 ‘화이트워싱(whitewashing)’으로 끊임없이 비판받아 왔다. 최근 사례만 봐도 2015년 개봉한 영화 ‘마션’은 원작에서 한국계로 그려진 과학자 민디 박을 백인 배우 매킨지 데이비스가 연기했으며,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원작의 ‘공각기동대’ 역시 주인공 구사나기 소령 역에 백인 여성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했다.

화이트워싱 논란에 대한 반발로 2016년 미국 네티즌 사이에서 시작된 ‘존 조 주연시키기’(Starring John Cho·유색인종 캐스팅 요구) 캠페인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결국 디즈니는 실사 영화 ‘뮬란’의 주인공으로 백인 배우 제니퍼 로렌스를 물망에 올렸다가 화이트워싱 논란이 일자 중국 여배우 리우이페이(유역비)로 최종 낙점했다. 디즈니는 지난해 11월 리우이페이 외에 ‘뮬란’의 모든 배역을 아시아인으로 캐스팅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직도 차별이 여전하지만 조금씩 개선 움직임을 보이는 미국과 비교해 영국은 최근에야 화이트워싱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BBC방송은 31일(현지시간) 영국에서 동아시아 배우들이 영화, TV, 무대 등에서 맞닥뜨리는 편견과 차별을 분석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지난해 1월 런던 프린트하우스 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죽은 사랑 속에서(In the depth of dead love)’는 화이트워싱 논란에 불을 붙였다. 영국 연극계의 거물 극작가 중 한 명인 하워드 바커의 신작인 ‘죽은 사랑 속에서’는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했지만 모든 캐스트가 백인으로만 채워졌다. 당시 영국 연출가 앤드루 키츠와 중국계 영국 배우 다니엘 요크는 동아시아계 배우, 런던 공연계 관계자들과 프린트하우스 극장에 항의 메일을 보내는 한편 극장 밖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백인 캐스팅에 대해 극작가인 하워드 바커는 침묵했고, 프린트하우스 극장은 “고대 중국이 배경이지만 이야기 자체는 중국과 특별한 관계가 없어 캐스팅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린트하우스의 답변은 오히려 논란에 불을 지피는 결과가 됐다. 이어 백인 배우들이 동양인을 연기하면서 눈을 찢어지게 분장하고 피부를 노란색으로 칠하는 ‘옐로페이스(yellow face)’ 관행에 대해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또한 극중 유모 역으로 아시아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것 역시 비난을 받았다.

‘죽은 사랑 속에서’ 사태 이후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오페라 단체인 뮤직시어터웨일스는 페테르 외트뵈시의 오페라 ‘골든 드래곤’을 백인 배우로만 캐스팅했다가 런던 공연이 취소되는 사태를 맞았다. 지난해 3월 한국 통영국제음악제에서도 선보인 ‘골든 드래곤’은 중식당을 배경으로 중국인 이민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런 풍토에 대해 영화 ‘해리포터’에 나왔던 중국계 여배우 케이티 렁은 “아시아계 배우들이 인종과 관계없는 역할을 맡는 것이 극히 드물다”고 토로했고, 영국 드라마 ‘휴먼스’로 스타 반열에 오른 여배우 젬마 챈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 여배우보다 외계인을 더 많이 볼 것”이라고 개탄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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