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강력한 ‘하나’를 표현하려 ‘나머지’를 희생시키다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27년 새로운 작업실을 마련한 뒤 완성한 작품 ‘응시하는 머리’. 초현실주의 작품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필자 제공
 
자코메티의 모델이었던 사진작가 엘리 로타르가 촬영한 자코메티의 작업실. 코바나컨텐츠 제공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분리(分利)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22년 1월 9일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실험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스탐파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스탐파는 그에게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같은 곳이었다. 아버지 지오반니 자코메티는 스탐파에서 아들에게 예술을 처음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는 기독교 신앙의 엄격함을 알려줬다.

자코메티는 자신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는 알을 깨고 나온 새끼 거북이처럼 망망대해와도 같은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거룩한’ 도시였다. 당시 파리는 ‘근대’라는 조각을 정과 망치로 과감하게 부수고 20세기라는 ‘현대’를 조금씩 만들어가던 도시였다.

‘현대’를 정의한 사람은 3명이었다. 이들은 과거지향적인 근대를 허물고 미래지향적인 현대를 건설했다. 한 명은 찰스 다윈이다. 그는 1859년 ‘종의 기원’이란 실험적인 책에서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선을 제공했다. 다윈이 발견한 사실은 인간도 변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자코메티는 끝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대상의 ‘순간’을 포착해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다윈은 자코메티에게 관찰의 덧없음과 응시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두 번째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다. 그는 금융시장과 자본주의가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1867년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들의 정신적인 고독, 즉 소외(疏外)를 깊이 들여다봤다. 그는 영국에서 파리로 건너온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공산당선언’을 작성했다. 엥겔스를 따라 영국 런던으로 가 ‘노동자들의 성서’인 ‘자본론’을 저술했다.

자코메티 작품의 주제 중 하나는 ‘소외’다.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가 충돌하여 빚은 1, 2차 세계대전의 비참함을 목도하면서 소외의 문제를 작품에 담았다.

세 번째 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그는 1900년에 인간 이해의 근본적인 틀을 전환시키는 ‘꿈의 해석’을 발표했다. 그는 인간의 ‘자아(自我)’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꿈이라는 점을 알려주었다. 문화와 문명은 인간 심성 밑바닥에 억눌려 표면으로 떠오른 적 없는 ‘무의식’이라는 빙산의 한 조각이었다.

자코메티가 프랑스로 이주해 당시 입체주의나 초월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실험한 작품들의 바닥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libido)’라는, ‘억눌린 성’에 대한 표현이 깃들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소외된 인간의 표상, ‘또 다른 자신’과의 관계가 담겨 있다.

수학(受學)

파리는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생각들이 모여 지적인 소용돌이가 일던 지역이었다. 이 소용돌이는 가장 먼저 예술 분야에서 감지됐다. 특히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됐다. 자코메티는 몽파르나스 사거리 근처 쇼미레르가 14번지에서 앙트완 부르델이 가르치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다녔다. 여기서 보낸 5년 동안 자코메티는 부르델을 통해 과거의 기술들을 습득했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사도 바울은 이전 전통을 섭렵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더해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그는 이 과정을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고전 15:3)라고 표현했다. 이 문장에서 ‘받았다’라는 의미가 담긴 그리스 동사는 ‘파라람바노’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관한 내용을 전달받은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지혜를 더해 새로운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복음 전달의 통로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전승 과정은 당시 유대교 경전인 ‘미쉬나’에도 등장한다. 미쉬나에는 중국의 ‘논어’ 같은 ‘선조들의 어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첫 구절도 유사하게 시작한다. “모세는 시내산으로부터 토라(경전)를 받았고, 그것을 여호수아에게 전달하였다.” 모세는 자신이 경전의 저자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경전을 받아 후대에 전달한 심부름꾼이었던 것이다.

자코메티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1925년 재현 미술이나 구상 미술에 흥미를 잃었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아방가르드 조각 연구였다. 당시 유럽의 예술가들은 인상주의를 지나 후기 인상파, 야수파, 입체주의, 그리고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부족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은 새로운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자코메티는 이 시기에 신체의 몸통만 조각한 ‘토르소’(1925), 아프리카 덴 부족에게서 영감을 받은 ‘숟가락 여인’(1926)을 완성했다. 스승 부르델의 인정을 받으려는 응석이었다.

이주(移住)

자코메티는 1922년 아버지의 권유로 파리에 왔고, 1926년까지 부루델 밑에서 예술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주체적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를 그만뒀다. 그는 프루아드보가에 있던 작업실의 천장이 너무 낮고 조명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1927년 4월 그는 프루아드보가에서 900m 떨어진 이폴리트맹드롱가 46번지로 이사를 갔다. 자코메티와 동생 디에고는 이곳 작업실에 작품들과 미술 도구를 손수레에 실어 날랐다.

이 작업실은 자코메티가 죽을 때까지 거의 40년 동안 그에게 예술의 용광로가 돼 주었다. 이곳은 모세의 호렙산 가시덤불이었고, 엘리야의 시내산 동굴이었다.

그가 이사한 작업실은 1910년대에 지은 건물이었다. 건축폐기물들을 주워서 만든 3층 건물이었다. 전기나 수도, 난방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복도 중간엔 허술한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작업실은 복도 왼쪽에 있는 첫 번째 방이었다.

그는 이곳에 침대와 책상, 찬장을 들여놓았다. 좁은 방이었지만 천장이 높았다. 창문으로는 햇빛이 충분히 들어왔다. 방 가운데에는 조각대와 화판, 그리고 조각과 회화에 필요한 도구들을 갖다 놓았다. 자코메티는 이 어둡고 초라하고 추운 공간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신기한 공간이 됐다.

응시하는 머리

자코메티는 이곳에서 아버지의 예술과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전수받은 예술이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석고로 완성한 ‘응시하는 머리’는 이폴리트맹드롱가 46번지 작업실에서 드디어 발견한 자코메티,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 작품은 여성적이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키클리데스 대리석 동상이나 이집트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기원전 3100년 작품 ‘나르메르 화장품’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응시하는 머리’는 보는 이를 평온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내가 누구인지 묻게 만드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직사각형이다. 왼편에 세로로 타원이 음각돼 있고, 오른편엔 가로로 타원이 새겨져 있다. 자코메티는 다윈의 변화무쌍이나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같은 비육체적인 조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작품은 단순하고 분명하지만 동시에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 같다. 혁신적이다. 좁은 직사각형 몸이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을 어떤 대상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니라 ‘기억’에만 의지해 제작했다. 대상의 본질은 이성적인 분석을 통해 표현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그는 알았다. 자코메티는 기억 속에 떠오르는 강력한 인상 한 가지를 표현하기 위해 ‘나머지’를 희생시켰다. 희생만이 나의 고유함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몸에서 팔다리를 모두 없앴고, 그래서 남겨진 건 직사각형뿐이었다. 이 직사각형의 판은 자코메티에게 만족스럽거나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 본질을 찾기 위해 많은 걸 걷어내다 보니 남은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대상을 표현할 수 없는가를 표현했다. 전통적인 조각 방식을 산산조각냈다. 정확한 묘사, 그 형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자만심, 그리고 추상을 통해서만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입체파의 교리를 파괴했다. 이 작품은 그를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이너 서클’에 가입시키는 허가증이 되었다.

‘응시하는 머리’는 동상이 아니라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 괴물이 된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 ‘자기모순’을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나는 지금 나를 바라보는 ‘응시’를 바라본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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