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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야사] 정치에 이용 당하고 국제적 갈등 푸는 역할도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서 관람객들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뒤쪽에 나치 깃발(왼쪽)과 성조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4> 스포츠에 개입된 정치

나치 선전의 장으로 악용된
4회 대회 ‘최악’ 평가 받아
1984년 사라예보 올림픽은
동서 어우러져 감동 연출


스포츠는 때로 권력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다. 특히 정치인들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린 제4회 동계올림픽은 역대 최악의 동계올림픽으로 평가 받는다.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은 같은 해 열린 베를린 하계올림픽과 함께 동계올림픽을 나치 독일 선전의 기회로 판단했다. 교묘한 선동정치로 나치 세 확장에 앞장섰던 선전부 장관 파울 괴벨스가 직접 올림픽을 준비했다.

독일 남부의 관광·휴양도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곳곳이 ‘아리안 혈통이 우월하다’는 홍보물로 채워졌다. 심지어 올림픽 주경기장까지 나치 깃발과 상징으로 뒤덮였다.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올림픽 기간에도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당시 각국은 독일이 올림픽을 악용해 이 같은 행태를 보일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올림픽에 참여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국제적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독일은 막대한 시설 투자를 집행하고 선수단을 극진히 환대해 여론을 환기하려 했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올림픽은 우리 선수가 처음으로 출전한 동계올림픽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조선인 3명이 스피드스케이팅 일본 대표로 뽑혀 출전했다. 이들은 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1984년 유고슬라비아(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은 스포츠가 국제적 갈등을 풀었던 사례로 남아 있다.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동서 진영 간 긴장의 끈이 팽팽해졌다. 미국은 1980년 자국에서 열린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지만, 소련은 선수들의 출전을 강행했다. 같은 해 여름 소련에서 개최된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서방 국가들이 보이콧을 선언하고 불참했다.

이런 가운데 4년 뒤 동구권에서 최초로 열린 동계올림픽인 사라예보 올림픽은 잠시나마 국제적 긴장을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역대 최대인 49개국, 1272명이 참가했다. 서방이 보이콧을 선언하는 일은 없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권이기는 했지만 독자 노선을 추구하면서 소련과 동맹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라예보 올림픽 개·폐회식에서 동서 진영 선수들끼리 서로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전 세계에 감동을 전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된 하계올림픽에 동구권이 불참하며 ‘사라예보의 화해’는 빛이 바랬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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