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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전정희] 성급한 여론



“원론적으로 탁치에 반대하지만 아직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을 읽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와 같이 흥분된 방법으로 회의를 이끌어 가는 것은 미국과 군정을 적으로 몰 수 있으므로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논의하자.”

1945년 12월 28일 서울 경교장에 당대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임정 세력과 국내파 민족진영 그리고 좌익 대표들이 신탁통치에 대한 긴급 현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중도 온건 노선의 송진우(1890∼1945·독립운동가)가 이같이 말했다.

앞서 모스크바 3상회의(12월 16∼27일)에선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 문제가 논의됐다. 그리고 27일 3상회의는 ‘한국에 대한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 구성 및 원조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임정과 공위의 신탁통치안 마련’ 등 공식 합의 내용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공식 발표가 있기도 전에 27일자 신문에 부정확한 보도가 나가버렸다. 미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38선 분할 점령을 위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기사였다. 25일 AP와 UP통신의 추측 보도를 26일 밤 국내 합동통신을 거쳐 27일 신문이 받은 것이다.

당연히 나라가 뒤집어졌다. 어떻게 얻은 독립인데 신탁통치라니. 28일 경교장은 그야말로 좌우를 막론하고 흥분에 휩싸였다. 당시 신문 보도는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불명하나’라는 단서를 달았으나 헤드라인은 ‘미국 즉시 독립’ ‘소련 신탁통치’였다. 사실 신탁에 대해선 미국은 최장 10년, 소련은 5년을 주장했는데도 말이다.

송진우의 냉정하자는 발언은 분노와 고성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경교장을 나오는 순간 그는 공공의 적이 됐다. 송진우도 반탁이었다. 다만 반탁에 따른 미군정과의 충돌을 염려했던 것이다. 불과 사흘 후 송진우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의 습격을 받아 숨진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 아날로그 시대, 모스크바발 소식을 냉정하게 보지 못한 우리는 ‘신탁과 반탁’이라는 역사의 광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는 세력들은 흥분과 충동을 부추겼다.

이 신중치 못한 여론이 북한의 핵미사일을 둘러싼 한반도 정세에서도 여전하다. 그 정세 속에 치러지는 평창 동계올림픽 문제가 단지 ‘예측 불허 북한’과의 단선적인 사안이 아닐진대 여론은 정파의 힘겨루기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쏠린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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