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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존엄사-연명의료 둘러싼 우리사회 현실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해 있는 한 환자가 병원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종양내과학 전문가인 허대석 서울대 교수는 저서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을 통해 호스피스의 가치와 다음 달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의미를 들려준다. 뉴시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인 대다수는 집에서 죽었다.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은 10명 중 1명밖에 안 됐다. 그 시절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어떤 방법도 목숨을 부지하는 데 별무소용인 단계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 삶을 정리했고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이 되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보라매병원 사건’이 발단이었다. 1997년 12월 보라매병원의 한 의사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보호자 뜻에 따라 퇴원시켰다가 살인방조죄로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이 의료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불문가지다. 의사들은 가망 없는 환자라도 병원에 붙잡아둬야 했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라는 지적을 받더라도, 환자가 고통스러운 치료만 받다가 죽음을 맞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이때부터 한국인 대다수는 병원에서 죽었다. 2016년 통계를 보자. 사망자 28만명 가운데 21만명이 병원에서 숨졌다. 이들의 죽음은 평안했을까. 집이 그립진 않았을까. 의미 없는 치료에 매달리느라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할 시간도 갖지 못한 건 아닐까.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은 한국사회 죽음의 풍경을 그려낸 작품이다. 서울대병원에서 30년 넘게 일하고 있는 허대석(63) 교수가 썼다.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의미와 맹점을 소상하게 살핀 내용이 책의 전반부를 장식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한 법률이다. 이 법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얼개를 띠는지는 인터넷만 찾아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한계와 실효성에 대한 내용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쓸데없는 연명의료 탓에 인생의 끄트머리가 엉망진창이 돼버린 환자들의 이야기다.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A씨의 사례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A씨는 위암 선고를 받았다. 암 세포는 간으로 전이됐다. 그는 6인실 병상에 누워 온갖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차도는 없었다.

담즙을 빼내기 위해 옆구리엔 배관을 달아야 했다. 마약성 진통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A씨는 결국 숨을 거뒀고, 의료진은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마지막까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책에는 A씨의 사연이 기다랗게 이어진 뒤 이렇게 적혀 있다. “환자 몸에 부착된 관은 6개나 되었고, 사망 후 이를 제거하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병실을 함께 썼던 다른 환자들이나 그들의 보호자에겐 그의 임종과 뒤처리 과정을 지켜보는 자체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허 교수는 국내 의료계의 열악한 실태를 하나씩 소개한다. 일단 한국의 병원엔 환자나 보호자가 울거나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많은 환자들은 의사들이 마약성 진통제 사용에 부정적이어서, 혹은 상급 종합병원이 아니면 이들 진통제를 취급하지 않아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둔다. ‘임종실’을 갖춘 병원도 별로 없다.

말기에 접어든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완화 의료’의 가치를 강조한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호스피스의 중요성을 역설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20대 청년 B씨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 대표적이다. 고아였던 B씨는 암 선고를 받고 호스피스에 입원하는데, 한 중년 여성이 그를 보살펴줬다. B씨는 죽음을 앞둔 어느 날 자신의 소원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어머니라는 말을 못해봤는데 죽기 전에 저를 돌봐준 봉사자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결국 B씨는 이 여성의 품에 안겨 “어머니”를 부르며 울다가 숨을 거뒀다. 허 교수는 B씨의 사연을 소개한 뒤 이렇게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당연히 소유하고 누리는 일을 어떤 이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해 상처로 간직하고, 또 그것을 채 치유 받지 못하고 세상을 뜨기도 한다. 일반적인 병원에서 하지 못하는 일 가운데 호스피스가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이처럼 상처 치유를 돕는 일일 것이다.”

코끝이 매워지는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허 교수는 이들 사례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의술이 인술(仁術)이 되려면 무엇을 고민해야하는지, 우린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하는지. 이 책은 이렇듯 복잡다단한 난제들이 수록된 한 권의 문제집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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