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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수 열전] 세계 최강 이승훈에 ‘빙속황제’ 크라머 도전장



밴쿠버·소치 1승1패… 평창서 삼세판
매스 스타트 이승훈엔 최적의 종목
곡선코너 스피드·자리싸움 한수위
마지막 바퀴 추입력도 추종불허
크라머 지구력 탁월
초반 독주 변수


2010년 2월 캐나다 밴쿠버 리치몬드 올림픽 오벌. 레이스를 마친 세계기록 보유자 스벤 크라머(네덜란드)가 갑자기 고글을 벗어 집어던졌다. 그는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번갈아 25바퀴를 도는 스피드스케이팅 1만m 레이스 도중 8바퀴를 남기고 인코스에 두 번 연속 들어섰었다. 크라머가 코스를 잘못 안내한 코치의 손을 뿌리칠 때, 그의 뒤에서 태극기가 펄럭였다. 스피드스케이팅 입문 10개월인 이승훈이 세계 정상에서 환호하는 순간이었다.

4년 뒤인 2014년 2월 러시아 소치 아들러아레나 스케이팅 센터. 5000m 12위에 머문 이승훈이 고개를 숙인 채 크라머의 곁을 쓸쓸히 지나쳤다. 5000m 2연패에 성공한 크라머는 취재진에 둘러싸여 “1만m도 문제 없다”는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이승훈은 “간밤엔 문제가 없었는데 경기장에 들어선 뒤 신경이 곤두섰다”는 말을 남겼다.

‘삼세판’은 다음 달 평창이다. 소치 이후 4년, 이승훈의 뜨거운 각오는 얼음판을 녹여 왔다. 이번엔 불안한 마음으로 서로의 랩타임을 확인할 필요가 없는 동시 승부다. 네덜란드 언론들은 최근 “크라머가 쿤 페르베이와 함께 네덜란드 대표로 매스 스타트에 참가한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 종목 세계랭킹 1위는 이승훈이다.

8년을 건너온 최종 승부는 마지막 단 한 바퀴에서 결정된다. 5000m와 1만m 등 ‘세퍼릿 코스’에서는 크라머의 지구력이 한 수 위로 평가되지만, 기록이 아닌 순위 싸움인 매스 스타트에서는 이승훈이 세계 최강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제갈성렬 의정부시청 빙상단 감독은 10일 “이승훈은 항상 마지막 한 바퀴에서 모두를 추월하는 방식으로 우승해 왔다”며 “세계의 선수들이 약이 바짝 오를 정도”라고 말했다.

매스 스타트는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이승훈에게 최적의 종목이고, 크라머라 해도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세계랭킹 1위 출신인 이강석 의정부시청 빙상단 코치는 “크라머는 공식적으로 매스 스타트 경기에 나서본 경험도 없다”며 “이승훈이 즐기는 마지막 바퀴의 승부에서는 크라머라 해도 이승훈에게 부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동계올림픽 첫 메달리스트인 김윤만 대한체육회 과장은 “이승훈에게 쇼트트랙 경험이 있는 만큼 크라머의 매스 스타트 참여가 큰 변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제갈 감독은 “곡선 코너에서의 스피드, 지구력, 순간적인 자리싸움 능력 등에서 이승훈이 유리하다”고 했다. 반대로 크라머에 대해서는 “무리 속에서 스케이팅하며 선수들을 이용하고 게임을 조율하는 전략성은 규명된 게 없다”고 했다. 마지막 한 바퀴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스퍼트 능력도 이승훈이 우위다. 5000m나 1만m를 주로 타는 크라머는 이 정도의 폭발력을 보인 적도, 본 적도 없다.

환경적인 요인도 이승훈에게 유리하다. 이번 대회가 열리는 강릉 오벌은 인코스 안쪽 웜업존 폭이 4m에서 5m로 넓어졌다. 맨 안쪽 링크를 타는 매스 스타트의 곡선주로 반원이 반지름 22m에서 21m로 작아졌다는 얘기다. 급해진 코너에서는 신장이 작은 선수가 유리하다. 미세한 차이지만 고수들 틈에서는 큰 변수다.

이승훈도 조심할 부분은 있다. 이강석 코치는 “크라머가 끼어들며 생겨날 레이스 패턴 변화가 관건”이라고 평했다. 힘을 아끼는 이승훈은 초반에 치고나간 선수를 따라잡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크라머가 초반에 레이스를 흔들 경우 과연 어느 정도로 거리를 유지할 것인지, 전략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제갈 감독은 이승훈의 전략이 모두 노출됐고, ‘공공의 적’임을 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4차례의 월드컵에서는 국적이 다른 유럽 선수들이 협동으로 이승훈을 견제하는 모습마저 있었다고 한다. 제갈 감독은 “매스 스타트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며 빈틈없는 대비를 당부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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