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죽음을 응시하는 일상의 성찰


 
①이 영화에서 심은하가 보여준 놀라운 자연스러움은 그를 단순히 스타가 아닌 배우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②정원의 사진관으로 쓰이던 초원 사진관 세트는 이후 군산의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③생전에 정원이 찍은 다림의 사진. 영화 마지막에 다림은 사진관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보고 기뻐한다. ④텅 빈 운동장 위로 흐르는 한석규의 내레이션은 그가 자신의 속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필자 제공
 
2005년 일본에서 리메이크된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허진호 감독


1998년,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멜로가 새해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익숙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어딘지 달라 보였다. 한 해 전,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의 순애보를 내세워 여성 관객들의 눈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영화 ‘편지’의 전략은 여기 없었다. 이 영화는 죽음과 사랑을 다루면서도 눈물에 호소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남자가 나오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을 섣불리 불러들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석규와 심은하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에게서 평범하고 맑은 의외의 민낯을 발견해냈다. 신파의 틀을 답습하지 않고 모든 화려함을 거둬낸 정직하고 고요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도착했다.

고향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한석규)은 자신에게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족들도 그걸 모르지 않으나 누구도 그 슬픔을 내색하지 않는다. 어느 날, 그 앞에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이 선물처럼 나타난다. 그녀는 자꾸 사진관을 찾아와 그의 곁을 맴도는데, 그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한다. 둘은 점차 감정을 나누게 된다. 이것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지탱하는 내용의 전부다.

그렇다면 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우리를 건드린 것일까. 평자들은 그걸 일상성이라는 말로 불렀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어떤 장면들은 사건에 직접적으로 귀속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있다는 걸 ‘8월의 크리스마스’는 보여주었다. 빼곡한 대사나 의미로 가득 찬 행동 패턴이 실은 얼마나 인위적인 장치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하게 되었다. 인물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쳐야할 필요가 없었다. 구체적인 일상적 단면에 카메라를 멈춰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령, 이런 장면들. 마당 수돗가에서 정성껏 파를 씻던 정원은 하늘에서 툭 떨어진 빗방울을 올려다본다. 그에게 새삼스럽게 전해졌을 촉각적 잔상이 이 순간 화면에 퍼진다. 함께 수박을 먹던 정원과 여동생이 입 속의 씨를 마당으로 뱉는다. 마치 장난치던 어린 날로 돌아간 것 같은 모양새인데, 갑자가 여동생이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울음을 삼킨다. 한 밤, 아버지의 담배를 몰래 들고 나온 정원이 빗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태운다. 영화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가만히, 오래 바라본다. 정원이 마루에서 등을 구부리고 발톱을 깎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천장을 보며 누워 있고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텅 빈 운동장, 깨끗하게 설거지 된 그릇들도 영화의 소중한 한 컷이 될 수 있었다. 신기한 건 약 20년이 지난 현재에 다시 봐도 그런 장면들이 촌스럽거나 낡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포착한 일상의 생기에는 멜로의 상투성을 이기는 동시대적인 힘이 있다. 그런데 그 일상성과 관련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등장한 한국 멜로물들 다수가 이 영화의 일상성을 모방하며 자주 함정에 빠졌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좋겠다. 이들에게 일상성이란 그저 사사로운 것들의 맥락 없는 나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건 거대 담론에 눌려 온 삶의 영역을 구해내는 방식이 아니었다. 지나고 나면 망각되어도 무방한 농담거리나 이상한 나르시시즘 같은 것이었다. 일찍이 영화평론가 허문영이 ‘오인된 일상성’이란 글에서 당대의 경향에 가한 비판은 적확한 것이다.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 혹은 쇄말주의(trivialism)”(‘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는 영화의 일상성이 아니라 빈약함과 게으름을 증명할 뿐이었다.

그러니 ‘8월의 크리스마스’가 길어올린 일상성의 가치는 그것의 평이함 때문이 아니라, 유일무이함 때문이라고 말해야 옳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건 이것이 죽음을 앞둔 자의 일상이라는 점이다. ‘쇄말주의’에 매몰된 일련의 멜로물들과 이 영화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 영화는 단지 일상을 파편적으로 무분별하게 펼쳐내는 대신, 그것을 진중하게 응시하는 시선을 성찰한다. 여기서 죽음이 다가오는 걸 바라보는 시간과 삶을 살아내는 과정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일상성이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생활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였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사건으로 닥쳐 ‘나’의 삶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우리는 IMF 외환위기로 인한 거대한 사건들의 연쇄 속에서 일상이 복원 불가능하게 무너지던 시기를 살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화 안팎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어있긴 마찬가지였지만, 죽음이 드리워질수록 일상의 감각을 지키는 데 몰두하는 영화의 담대함은 이미 우리의 현실에서 찾기 어려웠다. 이 영화가 그 힘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운 것이다.

병든 자의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한 삶의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병들어있지 않다는 점도 우리를 감응하게 했을 것이다. 허진호 감독은 정원의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병명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 그가 병으로 고통 받는 순간이 설명되어야 했을 텐데, 그걸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정원이 아파서 울부짖는 장면은 물론, 병상에서 죽어가는 모습도 나오지 않는다.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러움에 통곡하거나 가족 등에 업혀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잠깐 등장하는 정도다. 영화는 정원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려고 하면 가차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버린다. 정원의 죽음을 암시하는 후반부에는 대사가 거의 없다. 그의 마지막은 병상이 아니라 자신의 카메라 앞에 앉아 미소 짓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삶의 감각에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고통의 전시에는 더없이 냉정하다. 삶의 물성은 끝까지 살려내지만, 고통의 물성은 함부로 깨우지 않는다(앞서 언급했던 영화 ‘편지’나 이 지면에서 다뤘던 ‘약속’을 상기해보면 그 차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고집은 “죽음은 굉장히 개인적인” 문제라는 허진호의 생각에 닿아 있을 것이다. 죽음을 파국으로 형상화하지 않으며 그것을 담담하게 환기하기 위해 이 영화는 줄곧 사진의 속성을 경유한다. 사진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유한성을 지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의 절대적인 충만함을 그대로 보존한다. 그것은 사람의 정면 얼굴이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얼굴이 품고 있는 것들을 전부 알지는 못한다. 사진이 찍힌 과거와 사진을 보는 현재, 혹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거리가 언제나 전제된다. 이 영화가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렇다. 영화는 그들의 개별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사연을 낱낱이 파헤치지 않고 그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존중한다.

정원의 사진관에서 본 광경 하나를 떠올려보자. 자식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영정사진을 찍었던 노인이 그날 밤 다시 홀로 사진관을 찾는다. 세찬 빗줄기를 뚫고 온 노인은 분홍빛 한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그때 카메라 앞에 앉은 노인의 표정은 ‘온전하다’는 표현에 어울린다. 자식들 틈에서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얼굴이다. 평온하고 담담하고 곱다. 아마도 영화는 이 영정사진의 상태를 최대한 닮고 싶어 하는 것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견지하는 자연스러운 생기와 신중한 조심스러움은 거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가수 김광석이 쾌활하게 웃고 있는 영정사진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귀결되지만, 그 죽음은 이 영화에 답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더 많이 남겨 둔다. 서사 상으로 두 남녀의 사랑은 시작한 것도, 완성된 것도 아닌 채 영화는 끝난다. 주류 멜로물의 관습을 기준으로 본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는 미완성의 영화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감정의 공기를 이렇게 차분하고 끈질기게 지속시키는 멜로를 우리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접하지 못했다. 인물들은 멜로의 전형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정원은 정원이고 다림은 다림일 따름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무릅써야 하는 현실만으로도 벅차던 시절, 이 영화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극복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도 껴안을 수 있는 감정의 온기 같은 것이 있음을 자신의 세계로 묵묵히 보여주었다. 희귀하고 절실한 온기였다.

이 영화의 성취 상당부분이 촬영을 맡은 유영길 감독 덕분이라는 사실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 빛과 구도로 완성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안타깝게도 그의 유작이 되었다. 이 영화의 기술 시사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잡지 ‘키노’는 추모기사에서 황망함을 전하며 그가 남긴 작품들을 “성품의 카메라, 마음의 카메라”(1998. 2)라는 말로 정리했다. 영화 속에서 그가 내내 바라보았을 정원의 모습이 그 자신에게 겹쳐질 수밖에 없는 마음 아린 순간이었다.

허진호 감독은… 장편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로 대종상 등 휩쓸며 우뚝

허진호 감독은 1963년에 태어났고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중고차 매매업에 종사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단편 ‘고철을 위하여’를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박광수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우며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연출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장편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 해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상을 휩쓸며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찬사를 받았다. 3년 뒤, 그는 유지태와 이영애를 기용한 멜로 ‘봄날은 간다’로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이 작품은 이혼녀와 연하남의 사랑을 그리는데,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유지태의 대사는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2006년에는 배용준과 손예진을 주인공으로 배우자의 불륜 때문에 만난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마는 ‘외출’을 선보이며 멜로의 필모그라피를 더욱 섬세하게 다졌다. 2007년에는 황정민과 임수정을 주연으로 요양원에서 만난 병든 남녀의 사랑이야기 ‘행복’을 선보였다. 그간 신파를 신중하게 빗겨갔던 그의 멜로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한가운데 서기를 자처했다. 2009년에는 정우성 가오위안위안과 함께 ‘호우시절’을, 2012년에는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장동건 장바이즈 장쯔이가 등장하는 동명의 영화로 리메이크했다. 2016년에는 손예진 박해일을 주연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의 삶을 다룬 ‘덕혜옹주’를 만들었다. 그의 멜로는 한동안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 했으나, 이 시대극 멜로는 500만 이상의 관객들을 불러들였다. 최근작으로는 한지민과 박형식이 출연하는 단편 ‘두 개의 빛: 일루미노’가 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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