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환희의 송가’ 이전에 절망이 있었다


 
성시연이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경기필 제공


클래식 음악계의 송년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교향곡 9번 ‘합창’과 더불어 시작된다. ‘합창’ 교향곡이 송년 레퍼토리로 처음 소개된 것은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두 달 만인 12월 31일 아르투르 니키쉬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평화와 자유에 바치는 콘서트’라는 제목의 제야 음악회에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2차 세계대전 참전국 출신 단원으로 구성된 연합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서독 지역의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합창’ 교향곡을 연주했다. 번스타인은 이틀 뒤인 성탄절 아침에 동베를린 지역의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재차 이 곡을 연주했다. 이후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는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이 연주하는 ‘합창’ 교향곡이 제야 음악회 고정 프로그램으로 정착했다.

‘합창’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종결을 알리는 단골 프로그램으로 정착한 것은 마지막 악장에 실린 쉴러의 ‘환희의 송가’가 지닌 메시지 때문이다. 베토벤은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인류 모두가 아무런 고통 없이 형제애를 나누는 유토피아를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다. 이 곡은 너무도 낙천적이어서 아름다운 꽃길만 떠오르지만 작곡 당시 베토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귓병이 악화되어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그에게 이 교향곡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지 못하고 대리 지휘를 세워야 했던 첫 작품이었다. 바로 직전까지도 그는 귓병을 숨기고 오페라 ‘피델리오’ 리허설을 직접 지휘했다. 하지만 그의 지휘봉은 오케스트라와 성악가 사이에 일대 혼란을 야기했고 조수 쉰틀러의 제지로 중단됐다. 절망한 베토벤은 극장에서 달아났고, 타격의 후유증은 오래 갔다.

베토벤의 개인적 비극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심각하게 진행된 귓병은 그를 심각한 불안에 시달리게 했고 공황상태까지 이르게 했다. 휴양지에서 요양 중인 베토벤을 찾아온 제자 리스는 “목동의 피리 소리를 듣자”며 베토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리스는 자신도 안 들린다고 거짓말하며 스승을 안심시켰지만 소용없었다.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동생 앞으로 유서를 남긴다. 바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다.

귓병의 악화로 인한 절망감과 불안을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이 유서는 한 편의 문학 작품처럼 숭고한 파토스를 품고 있다. 다행히 베토벤은 목숨을 끊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을 극복했고, 사람들은 그가 자살을 생각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유서는 4반세기 후 작곡가가 병으로 사망한 뒤 유품 사이에서 발견됐다. 그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나를 다시 (삶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의 예술뿐이다.”

죽음의 유혹을 극복한 뒤에도 베토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하고 상처 입던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한 모든 결핍과 모순을 예술의 일부로 포용했다. 우리가 ‘위대하다’ 칭송하는 그의 예술은 바로 결핍의 소산인 것이다.

1918년 니키쉬는 ‘합창’을 밤 11시에 시작해서 자정에 맞춰 ‘환희의 송가’를 부르고자 했다. ‘환희의 송가’ 이전의 1∼3악장은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을 묘사한다. 전쟁이 남긴 상흔을 저무는 해에 남겨두고, 새해에는 희망만을 노래하고 싶었던 한 지휘자의 소망이 독자 여러분에게도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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