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그는, 삶의 군더더기를 매일매일 깎아내고 있었다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1961년 비가 내리던 어느 날 프랑스 파리에서 포착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코메티가 코트를 머리 위까지 올리고 도로를 건너고 있다. 필자 제공
 
배철현 교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는 20세기 초 근대를 종식시키고 현대를 시작할 '새로운 인종'을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탄생시켰다. 그들은 가느다랗고 길며 삐쩍 마른 모습으로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고 있다. 혹은 대지에 굳건히 몸을 대고 우주의 끝을 응시한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겉모습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순수한 영혼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의 예술적인 여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 특별전'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를 과거의 잠에서 일깨울 것이다. 이 작품들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심연을 응시하도록 침묵을 훈련시키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필자는 자코메티의 작품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묵상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완수해야 할 임무는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혼돈 속에서 질서가 창조될 수 있는가?'
치열한 인간

우리는 인생을 치열하게 사는 인간에게 끌린다. 그는 자신의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인간은 오만하지 않아 자신이 어제까지 이루어놓은 작품이나 성과를 오늘 아침, 한순간에 폐기한다. 그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것을 묵묵히 추구할 뿐이다. 그는 인생을 에베레스트산보다 높은 천상의 산을 가는 순례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발걸음 하나하나다. 이 순간의 연속이 언젠가는 정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는 산 정상에 영원히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설령 그가 정상에 오른다할지라도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공간에서 무슨 행위를 해야 할지 모른다.

인간의 눈은 두개골 정면 위쪽에 움푹 파인 곳에 있어 정면밖에 응시하지 못한다. 아니 정면을 응시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장악하는 최선일지 모른다.

나는 몇 년 전 이상한 사진과 만났다. 언뜻 보기에는 유기된 동물이나 무명의 노숙자다. 자세히 보니 한 인간이 사진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이고, 이 사진에 등장한 인간은 누구인가?

결정적 순간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은 1960년대 초 위대한 예술가들을 사진에 담기 시작한다. 그가 카메라에 담고 싶은 내용은 그 예술가들의 작품이나 예술가들의 자화자찬적인 미소가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가의 몸과 정신, 그리고 영혼에 담겨 있는 원초적인 힘이다. 그 힘의 발산이 위대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브레송은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화가 앙리 마티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소설가 알베르 카뮈 등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한 예술가의 정수를 담기 위해 조그만 라이카 사진기를 그의 오른쪽 눈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숨을 멈추고, 그의 마음, 눈, 그리고 카메라의 렌즈가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 검지로 셔터를 누른다. 그는 이 순간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불렀다.

결정적 순간이란 빅뱅의 순간이자 우주 종말의 순간이다.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 순간은 신이 “빛이 있으라”고 말한 원초적인 순간이다.

걸어가는 고치

브레송은 한 인간을 찾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창작에 몰입하는 한 예술가다. 그의 이름은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코메티는 1926년, 그가 스물다섯 살 때 파리 14구역에 있는 이폴리트-맹드롱(Hippolyte-Maindron)에 작업장을 만들어 예술혼을 불태웠다. 브레송은 가끔 작업실에서 나와 카페로 가는 자코메티의 모습을 포착하기로 마음먹었다.

1961년 어느 날, 비가 내렸다. 브레송은 작업실에서 나와 카페로 가는 자코메티를 도로 한복판에서 만났다. 제법 세차게 바람에 흔들려 사선으로 떨어지는 비가 도로 바닥에 고여 있는 물과 부딪혀 분화구를 만들고 수평으로 흩어졌다.

이 사진을 기반으로 거리를 추측해 보자. 이 걸어가는 사람 뒤로 건물에 거리 이름이 적힌 팻말이 있다. 프랑스 파리 14구역에 있는 알레시아 거리다.

사진 왼편으로는 어린아이들이 많으니 함부로 운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그려진 교통 표지판이 있다. 브레송은 눈앞에 있는 가느다란 가로수 뒤에서 지금 막 길을 건너 다가오고 있는 자코메티를 발견하였다.

자코메티는 작업실에서 나와 카페로 가는 길 도중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점점 거세지는 빗방울이 머리와 얼굴에 떨어지자 오른손으로 자신의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머리 위로 올렸다. 코트를 완전히 올려 전체 머리를 감싸지 못한 이유는 왼손에 든 담배 때문이다. 담배는 그가 경험하고 싶은 사물과 사람의 본질을 끈질기게 집중하게 하는 도구다.

담배를 왼손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채 걷는다. 그는 오른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왼손은 다시 입에 물기를 기다리며 몸 앞에 두었다.

그는 걷는다. ‘걷는다’는 행위는 발의 각도와 방향의 조율이며, 다리와 허벅지의 반응이다. 또한 발과 다리를 이어주는 무릎의 유기적인 예술이다. 그의 왼발은 땅을 온전히 정착(定着)하고 있지만 그의 오른발은 공중에서 유영(游泳)한다. 왼발은 자신이 안주하고 싶은 과거이고 오른발은 자신이 열망하는, 아직 가본 적이 없는 미래다. 두 발은 새로운 자신을 개척하려는 투쟁이자 의지다.

침묵의 시선

브레송은 하늘에서 내리던 비도 멈추는 순간, 자코메티의 왼발이 공간에서 부양하는 순간을 낚아챘다. 순간이 영원이 되었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황금시대에 살면서 의학이란 분야를 창시한 히포크라테스가 유명한 말을 했다. 그는 아테네와 페르시아 전쟁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교과서를 만들었다. 이 교과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고 후대에 라틴어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라틴어 문장은 이렇다.

“비타 브레비스 아르스 롱가(vita brevis ars longa).”

이 유명한 문장을 직역하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이다. 번역이 항상 그렇듯이 원문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이 라틴어 문장을 해석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수명은 짧습니다. 순간과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찾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인 ‘예술’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자코메티의 ‘침묵의 시선’을 감지했다. 자코메티의 눈길은 살아있다.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본 사람만이 그 눈빛을 가지고 있다. 자코메티는 파리의 뒷골목에 있는 남들이 보기에는 어수선해 보이는 작업실에서 1926부터 1966년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 24시간, 거의 40년 동안 한결같이 이곳에서 침묵을 연마했다. ‘침묵’이란 내가 굳이 입으로 발설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지장이 없는 그런 쓸데없는 말들을 가려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 시간을 침묵한다. 침묵의 시간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치다. 자코메티는 작업장이라는 고치에서 나비가 되기 위해 매일매일 스스로 천지개벽을 연습한 인간이다. 구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잠 11:12)

이 문장에서 침묵하다는 뜻이 담긴 ‘잠잠하느니라’의 히브리어 단어 어근은 ‘하라쉬’다. ‘하라쉬’ 동사의 의미는 ‘조각(彫刻)하다’다. ‘침묵’을 수련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려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위대한 조각가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삶에서 쓸데없고 부질없는 것들을 매일매일 깎아내는 인간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다윗상을 조각하기 위해 다듬어지지 않는 커다란 대리석을 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손에는 정과 망치가 있다. 나는 이 커다란 돌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덜어낼 것이다.”

자코메티가 고치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비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자신에게 감동적인 ‘신의 형상’을 찾는 수련자이기 때문이다.

자코메티가 고치 안에 있지만 그를 다른 인간들과 구별시켜주는 특징이 있다. 그의 시선이다. 그는 자신이 조각하려는 모델을 몇 달이고 보면 볼수록 그 대상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는 막이 두터워진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 막을 걷어내고 자신과 주위, 그리고 신과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인생의 여정을 떠났다.

“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는 철학자 사르트르가 언급했듯이, 우리를 홍수 이전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남녀 구분도, 동물과 인간의 구분도, 인위와 자연의 구분도 없는 에덴동산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지구의 위치를 밝혔듯이,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통해 인간을 다른 동물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발견했듯이 자코메티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고 안에서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에 묻는다.

“현대적인 삶은 무엇인가?” “당신은 당신의 삶의 군더더기를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런 것들을 과감히 걷어낼 용기가 있습니까?”

■ 배철현 교수는
고대 근동언어와 문명에 매료되어 하버드대학교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서울대 종교학과에 재직하며, 고대근동종교와 유대·그리스도교를 가르치고 있다. 2014년엔 창의혁신학교인 '건명원(建明苑)'을 기획해 출범시켰다. 저서로는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말하다'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심연' '인간의 위대한 여정' 등이 있다. 최근에는 '길가메시 서사시'와 단테의 '신곡' 원문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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