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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부모의 양육태도가 아이를 바꾼다는 미신

소풍을 나온 아이들이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잔디밭에서 풍선을 들고 달리기를 하고 있다. 저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을까. 미국의 심리학자인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부모가 아이의 성격 형성 과정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강조한다. 국민일보DB




대단한 책이다. 아이는 부모하기 나름이라는 통념을 결딴내버린다. 첫머리에 실린 건 미국의 유명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글. 세상에는 그의 추천사를 앞세운 책이 많으니 심드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내용을 보면 상투적인 찬사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은 실세계에서 만날 수 없는 고분고분하고 조그만 인조인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아이와 부모들이 글자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감전된 듯한 충격을 주는 이 책을 접한 것은 내가 심리학자가 된 이래로 경험한 가장 짜릿한 일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이토록 대단한 격찬을 받는 주인공은 누구일까. 저자인 주디스 리치 해리스(79)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학계에서 입길에 오르내린 적 없는 재야의 학자였다. 그는 집에서 아동심리를 다룬 교재를 쓰다가 깨달았다. 부모의 가르침이 아이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양육가설’은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은 95년 유명 학술지 ‘심리학 리뷰’에 실렸다. 통설을 뒤흔드는 내용이 저명한 잡지에 게재됐으니 학계는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논문을 정리한 단행본은 98년에 나왔다. 책은 22개국에서 잇달아 출간됐다. 대단한 관심을 모았다. ‘양육가설’은 한국에 이제야 번역·출간된 게 의아할 정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문제작이었다.

책의 뼈대를 이루는 건 양육가설을 향한 가차 없는 비판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아이의 성격을 결정짓는 건 본성과 양육이라고, 특히 부모의 양육은 아이의 엇나가는 성격을 교정할 수 있는 으뜸가는 방법이라고.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양육가설에 반기를 든다. “전통적 심리학의 따귀를 때리는 듯한 도전”에 나선다. 그는 자녀의 사회화에 부모의 영향력은 미미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면서 기함할 정도로 많은 근거를 들이댄다. 독자의 직관에 반하는 이야기가 쉼 없이 이어진다.

이런 내용이 대표적이다. ‘출생 순서’ 탓에 형제간에 성격 차이가 생길 수도 있을까. 실제로 사람들은 첫째는 듬직하다고, 둘째는 애교가 많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편견이다. 스위스의 한 학자가 20대 남녀 7582명을 상대로 성격 검사를 실시했더니 ‘첫째’와 ‘둘째’ 사이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격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부모들이 일반적으로 출생 순서에 따라 자녀를 다르게 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모의 양육 행태가 아이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린이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와 부모가 직접 돌보는 아이 사이에서도 큰 성격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책에는 이들 케이스 외에도 양육가설을 뒤흔드는 수많은 사례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아이의 사회화를 이끄는 건 무엇일까.

핵심은 또래 집단이다. 아이는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가정의 울타리 안과 밖에서 각각 다른 삶을 산다. 사회화가 이뤄지는 건 집을 벗어나면서부터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면서, 또래 아이들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느끼면서 자신의 포지션을 정립해나간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구한 인류의 역사까지 끌어들인다.

“우리 조상들은 지난 600만년의 긴 시간에 걸쳐 작은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수렵채집 생활을 해왔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생명은 자기 부모들이 아니라 자기 집단의 생존에 달려 있었다. 왜냐하면 부모가 죽더라도 자기 집단이 생존해 있다면 아이들은 여전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최고의 성공은 최대한 빠르고 확고하게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자녀가 어리다면 부모는 아이가 어떤 친구들을 사귈지, 즉 어떤 또래 집단에 들어가게 만들지 결정할 수 있다. 자녀의 외모를 근사하게 꾸며주면 친구들 사이에서 “나쁜 꼬리표”가 붙을 확률도 낮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다. 부모가 자녀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보잘 것 없다. 저자는 ‘부모의 힘’을 과신하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자녀일 수밖에 없으니 저자의 주장을 수긍하지 못할 순 있지만, 허투루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은 각별한 의미를 띨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선 자녀 인생의 성패가 부모에게 달렸다는 식의 얘기가 정설처럼 퍼져 있으니까. 특히 이런 대목을 만난 국내 독자들은 밑줄부터 그을 것이다.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 양육을 즐겨라. …당신은 자녀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 자녀는 당신이 완성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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