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한국 문화예술계도 ‘거부의 혁명’을


 
지난 40여년 동안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예술 감독으로 재임했던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 그는 30여년 전 10대 음악가 지망생을 성폭행한 의혹으로 최근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사진은 2006년 7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레바인. AP뉴시스


미국 서쪽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성추행 폭로 파문은 결국 동쪽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까지 흔들었다. 지난 40여년간 이 오페라단 예술 감독으로 재임하며 전 세계 오페라계를 좌지우지했던 거물급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74)이 30여년 전의 성범죄 의혹으로 불명예 퇴진한 것이다. 뉴욕포스트는 한 40대 남성이 자신이 10대 시절 라비니아 음악 페스티벌 감독으로 있던 레바인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최초로 고발했으며 뉴욕타임스도 뒤이어 두 명의 남성이 레바인에게 입은 성폭력 피해사실을 추가 보도했다.

피해자들이 모두 음악가를 지망하는 어린 10대였다는 점, 그리고 레바인의 세계적인 권위와 입지를 고려하면 이 사건은 전형적인 권력형 성범죄이다. 무력한 어린 피해자의 직업적 미래를 볼모로 삼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감독과 투자자들에게 당한 피해와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엘리트주의와 도덕적 미학성을 강조하는 소위 클래식 음악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대중예술계인 할리우드에서의 폭로보다 그 파장이 더 클 것이다.

문화예술계의 권력형 성범죄는 어린 제자와 스승 예술가의 사이에서 주로 벌어진다. 대부분의 예술 교육자들은 현역으로 활동 중인 예술가이거나 은퇴했어도 여전한 입지가 있는 원로들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제자가 예술가로서 무사히 무대에 진입하도록 후원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콩쿠르 우승이라든가, 세계무대를 석권한 젊은 예술가들의 입신양명 기사에 스승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반대로 스승의 눈 밖에 나면 입신은커녕 데뷔도 힘들어지는 것이 예술계다.

그들의 권력 관계는 졸업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한 끝없이 작동한다. 설사 스승이 제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거머쥔 그들 앞에서 제자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지하철 성추행과 달리 이들의 범죄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지배 아래 나는 안전하고 보호받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용하고 학대했으며, 결국 망가뜨려 버렸다”는 레바인에게 피해 입은 이의 호소는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의 권력형 성범죄는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언론에 오르내린 사건들보다 거론되지 않은 수백 건의 사건들이 바로 한국 문화예술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여름 필자가 연구조사를 위해 문화예술계 여성 종사자들과 면담한 결과 국내 문화예술계의 성범죄 대부분이 학교 안에서 발생한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 학생 다수는 예술계 입문이 어려워질까 침묵하고, 일부 용기를 낸 소수의 목소리는 가해자의 예술적 명성과 사회적 영향력에 묻혀 ‘원래 품성이 나쁜 학생’의 모함으로 일축되기 일쑤다.

운 나쁘게 증거가 남아 징계를 받은 교수들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학교에 복직하고 예술계에도 멀쩡하게 고개를 들고 나타나 활동을 재개한다. 한 면담자는 “문화예술계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아니라 그런 교육자들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교육부가 나서야 한다”고 읍소했다.

지난주 금요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미투(me too)’ 캠페인을 벌인 당사자들을 선정했다. 자신들의 성범죄 피해를 폭로함으로써 무소불위의 기득권 세력에 일침을 가하고 약자의 권익을 증진하는 빠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거부의 혁명’이라 불리는 이러한 약자의 움직임이 여전히 보수적인 한국의 문화예술계, 그리고 교육계에도 필요하다. 다만 약자가 거부할 수 있는 권리, 그러한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의무는 오롯이 국가의 몫이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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