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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장마당서 싹튼 法, 核보다 강하다

경기도 파주 도라전망대에서 촬영한 개성공단이다. '햇볕 장마당 법치'에는 개성공단이 바꿔놓은 북한의 모습이 비중 있게 담겨 있다. 저자는 "개성공단은 북한이 공유재산인 토지를 개인에게 사적 수익 추구의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최초 사례"라고 적었다. 뉴시스





출판사가 내놓은 보도자료 첫머리엔 이렇게 적혀 있다. “햇볕도 못 벗긴 외투, 장마당이 벗기고 있다.” 저런 문구를 마주한 사람들은 십중팔구 예단할 것이다. ‘북한 사회에 스민 자본주의의 풍경을 그러모은 책이겠구나.’ 하지만 이 책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 인상적인 분석과 전망을 내놓는다. 북한의 시장화는 다양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북한에 파종된 법치주의의 씨앗은 한반도의 미래를 바꿔놓을 거라고 말이다.

‘햇볕 장마당 법치’의 저자는 시사주간지 기자인 이종태(50)씨다. 그의 글은 권투선수로 따지면 인파이터보다는 아웃복서에 가깝다. 책이라는 링에서 그는 때려눕혀야할 난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지 않는다.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공을 들인다.

중국의 현대사를 살핀 전반부 내용이 대표적이다. 과거 중국은 법치에 무지몽매한 국가였다. 공산당의 목소리가 지고의 가치였다. 법치 따위는 필요 없었다. 문화대혁명 때 일부 사회지도층을 상대로 이뤄진 그 유명한 조리돌림은 법이 유명무실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1978년 최고 권력자인 덩샤오핑이 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사회주의 법치’를 천명하면서 중국은 달라졌다. 82년 사유제산제를 헌법에 명시했다. 84년엔 세수(稅收) 조례를 만들었다. 89년에는 행정소송법까지 제정했다.

인치(人治)의 국가였던 중국은 왜 법치의 시스템을 받아들인 것일까. 바로 외국인 투자자를 위해서였다. 그들이 마음 놓고 중국에서 계약을 맺고 사업을 하려면 법이라는 안전망이 필요했다. 우리는 중국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체제를 바꾸는 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중국의 현대사를 길게 살핀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 곧 북한의 미래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아서다. 실제로 현재 북한은 중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

북한에 자본주의의 기운이 퍼지고 있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주민들은 웬만한 물건은 시장 역할을 하는 ‘장마당’에서 사고판다. “북한은 노동당과 장마당이라는 두 개의 당으로 유지된다”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다. ‘돈주’라고 불리는 자본가들의 파워도 막강하다. 휴대전화 사용자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택 시세’까지 등장했다.

시장화에 보조를 맞추려면 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2009년 부동산관리법을 제정했다. 개인이나 기업에 수십 년에 걸쳐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내용이다. 기업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독립채산제를 비롯한 각종 제도도 도입했다.

한국과 호흡을 맞춘 개성공단 사업은 북한에 요긴한 기회였다. 이 사업에서 자본주의의 법과 제도를 학습할 수 있었으니까.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한은 개성공단을 통해) 사회주의라는 큰 집을 허물지 않고도 경제특구란 걸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북한엔 ‘모기장 이론’이란 용어가 있다. 모기장으로 모기는 막고 공기는 통하게 만든다는 것. 여기서 모기는 서방의 사상이고, 공기는 돈이다.”

핵심은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다. 한반도의 지난한 숙제인 북핵 문제를 떠올려보자.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두 갈래다. 첫째는 강력한 제재를 통해 핵 폐기를 유도하는 ‘강경제제론’, 둘째는 대화를 통해 북·미 평화협정이나 수교부터 이끌어내자는 ‘대화론’이다.

저자는 강경제재론은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한다. 대화론에 대해서도 얼마간 부정적이다. 그는 “대화만으로는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없다”며 “북한의 벼랑 끝 전술로 인해 지지부진한 협상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적었다. 결국 장기전을 각오해야한다는 의미다.

장기전에서 예의주시할 건 북한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법치의 기운이다.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법치가 변화의 마중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북한이) 경제를 어느 정도 정상화할 수 있다면 점차 자신감도 커질 것이며, 이에 따라 외부 세계에 대한 공격성 역시 수그러들게 될 것이다. …북한이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인민들의 자유를 증진시키고, 법률로써 사회를 다스려나갈 때 북한의 변화는 이루어진다.”

어떤 반론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 법치의 효과를 과대평가한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당면 과제인 북핵 문제를 긴 호흡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대북 문제를 둘러싼 판에 박힌 논평이 지겨웠던 독자들에게 이 책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챕터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법은 핵보다 강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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