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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당신의 아파트엔 어떤 가치가 있나요?

서울의 한 대규모 브랜드 아파트 단지의 스카이라인이 한강에 그대로 비치고 있다. 인류학자 정헌목은 저서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에서 현장연구를 통해 아파트 입주민의 삶과 가치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한다. 픽사베이




한국 전체 가구의 절반, 도시 가정 70%가 거주하는 아파트. 아파트를 선택하고 아파트에 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탐색한 보고서다. 그동안 아파트를 둘러싼 계급과 욕망을 분석한 책은 많이 나왔지만 문화인류학적 시각에서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생활양식을 면밀하게 살펴본 경우는 드물었다.

인류학자 정헌목은 ‘현장연구’를 통해 수도권 브랜드 아파트 단지를 관찰한다. 그가 연구한 A아파트는 수도권 33만여㎡(10만여평) 부지 90여개 동에 9000가구가 사는 대단지다. 저자는 2년 넘게 단지를 방문해 주민들을 만났고 입주 전부터 연구 종료 시점까지 8년간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시된 수만 건의 글을 검토했다.

“나는 한국의 브랜드 아파트에서 벌어진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추적하고 기록하고 분석하고자 했다.” 첫 장에서 저자가 밝힌 의도다. 먼저 대단위 브랜드 아파트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아파트 약사(略史). 정부는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후 중산층이 살 수 있는 튼튼한 아파트를 짓기로 한다.

이촌동 한강맨션(1970), 여의도시범(1971), 반포(1972∼73) 아파트가 대표적 예다. 1970∼80년대 어느덧 아파트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92년 설문조사에서 30세 미만 52.8%가 아파트 주거를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97년 외환위기 후 아파트 건설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대기업 건설사들이 아파트 고급화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중반 대단지 아파트 브랜드 래미안 e-편한세상 아이파크 자이 푸르지오 등이 나왔다. A아파트 단지도 이런 분위기 속에 낡은 주공아파트를 재건축한 곳이다. 2003년 재건축 논의를 할 때 원주민이나 조합원 자격을 따낸 외부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아파트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나 보일러 시공업체 선정부터 아파트 이름 결정까지 모든 것은 아파트 값을 높이는 방향이 기준이었다. 조합원들이 조경에 주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동간 간격이 좁고 교통 체증이 심하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조경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여긴 간격이 좁아서 사람 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다니. 어떻게 하면 인식 전환이 될까요?’

저자가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인용한 글이다. 그러면서 주민들은 과거 단지에 있던 벚꽃나무 행방을 묻고 지상 공원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도시공간과 공동체를 연구하는 저자는 주민들의 이런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입주 전엔 소비자로서 아파트의 상품가치에만 주목했지만 2007년 입주 후엔 거주자로서 안전 교육 여가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 된 데는 외부적 요인도 작용한다고 필자는 분석한다. 아파트 가격 정체로 매매 차익 기대가 적어지면서 아파트 단지를 머무는 공간 그리고 공동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A아파트의 경우 2012년 지자체가 관리하는 청소 차량에 어린이가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주민들이 결집하게 된 게 단적인 상황이다.

독자들은 이런 대목에서 아파트가 담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영미권은 중산층 주거지의 교외화가 진행된 반면 프랑스 등 유럽권은 중산층이 도심 대로변을 차지했다고 한다. 한국은 A아파트 단지처럼 이 두 가지를 결합한 형태다. 즉 조경을 잘 갖춘 도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중산층 주거 모델로 자리 잡아가는 것이다.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논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문장이 건조한 편이다. 하지만 생생한 사례와 풍부한 자료에서 배우는 재미와 다양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다 읽을 때쯤 내가 사는 곳은 ‘사는(buy)’ 아파트와 ‘사는(live)’ 아파트 중 어디에 가까운지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우리 삶과 공동체의 가치를 들여다보게 한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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