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철학자가 빚은 조각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Head of a girl’. 1925∼28.


작은 입을 꼭 다문 소녀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또렷한 눈매와 오뚝한 코에서 단정함이 느껴진다. 어리광을 부릴 나이지만 이 소녀는 매사에 침착할 것 같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함께 뛰놀던 소꿉친구, 앞머리를 가지런히 잘랐던 귀여운 누이를 보는 듯해 친근하다. 황토빛 점토로 소녀의 흉상을 만든 사람은 뜻밖에도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역임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한 분석철학자다. 열아홉 나이에 ‘논리철학논고’란 저명한 책을 집필할 정도로 천재였던 그는 언어와 수학을 관통하는 철학 저술을 여럿 남겼다.

비트겐슈타인은 철강사업가였던 부친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가난한 문인들을 위한 기금으로 쾌척하고, 일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그는 음악과 미술에도 재능이 많았는데 1920년대 중반 수도원의 정원사 조수로 일하며 조각 작업을 했다. 대상을 똑 부러지게 빚어낸 솜씨가 자못 예리하다. 또 누나의 부탁을 받고 주택 건축 작업도 했는데 엄격성과 정확성을 특징으로 한 설계가 저술과 맥을 같이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각은 최근 비엔나 도로테움 경매에서 10만 유로에 낙찰됐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흉상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국외 반출을 제한했다. 유럽 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에 바치는 예우인 셈이다.

이영란(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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