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경의 힘, 겨울스포츠 불모지에 꿈 심다

싱가포르 쇼트트랙 대표팀의 전이경 코치가 현역 선수시절이던 1998년 1월 나가노동계올림픽에 나서기 전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 DB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출전권을 따낸 전 코치의 제자 샤이넨 고. 싱가포르 투데이스포츠 홈페이지


전 코치, ‘겨울 없는 나라’ 싱가포르서
2년간 한국 쇼트트랙 DNA 이식 노력

샤이넨 고, 中 월드컵 3차전 준결승행
사상 첫 동계올림픽 출전 기적


1994 릴레함메르동계올림픽.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앳된 얼굴의 한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가 여자 1000m와 3000m 계주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며 2관왕에 올라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4년 뒤 나가노대회에서는 2종목 2연패를 달성하며 쇼트트랙의 전설로 올라섰다. 그는 전이경(41)이었다.

그 전설이 2018 평창동계올림픽 무대를 다시 밟는다.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그런데 지도 대상이 우리나라 선수가 아니었다. ‘겨울이 없는 나라’ 싱가포르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싱가포르 사상 최초의 동계올림픽 진출이라는 결과가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겨울이 없는 자메이카 선수들의 동계올림픽 진출을 담은 영화 ‘쿨러닝’의 동남아시아 버전쯤 되는 기적을 전이경 코치가 이뤄낸 것이다.

전 코치는 싱가포르 쇼트트랙과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었다. 결혼 후 자녀 교육을 위해 싱가포르로 떠난 전 코치는 현지 빙상협회의 요청으로 2015년 11월부터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다.

하지만 동계 스포츠 불모지 싱가포르의 훈련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국제규격을 갖춘 아이스링크는 단 한 곳뿐이었다. 훈련을 한 번 하려면 한화 100만원이 넘는 고액 대관료를 내야 했다.

그럼에도 전 코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초부터 선수들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아이스링크가 아닌 맨땅에서도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시켰다. 운 좋게 아이스링크를 빌리면 짧은 시간 내에 단기 속성으로 선수들에게 쇼트트랙 기술을 가르쳤다.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발품을 팔아 유니폼 스폰서 계약을 끌어냈고, 현지 훈련 장소도 직접 섭외했다.

전 코치의 노력과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던 것일까. 싱가포르 선수의 평창동계올림픽 진출권 확보는 그야말로 천운으로 이뤄졌다.

싱가포르의 샤이넨 고(18)는 올 시즌 2017-2018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1, 2차 대회 통틀어 대회 랭킹 포인트를 1점 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3차 대회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샤이넨 고는 이 대회 여자 1500m 준결승에 올라 랭킹 포인트 144점을 얻었다. 예선에서 경쟁 선수들이 레이스 도중 엉켜 넘어지는 바람에 2위로 준결승에 오르는 행운이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 목동실내빙상장에서 막을 내린 월드컵 4차 대회에서 1점의 포인트를 더해 총 포인트는 146점이었다.

그는 종합순위로 랭킹 36위 안에 들어야 주어지는 여자 1500m 올림픽 출전권 1장을 36위로 따냈다. 37위가 145점이어서 간발의 차이로 출전권을 확보한 것이다. ISU는 24일(한국시간) 싱가포르가 포함된 평창올림픽 쇼트트랙 국가별 참가권 배분표를 발표했다. 전 코치가 쏟아부은 2년 간의 노력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고국의 팬들은 전 코치가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평창올림픽에서 많은 감동을 선사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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