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시 청년 ‘정현’, 세계 테니스 ‘미래’ 쐈다

정현이 1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결승전에서 안드레이 루블레프(러시아)를 상대로 리턴샷을 구사하고 있다. AP뉴시스
 
우승 트로피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 AP뉴시스


여섯 살 난 아들은 자꾸 눈을 찡그렸다. 검진 결과 심한 약시였다. 책 대신 눈이 편안해지는 초록색을 많이 봐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부모는 아들을 녹색의 테니스 코트로 데려갔다. 부모는 아들이 운동보다 공부를 잘하길 원했다. 하지만 아들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테니스를 만난 정현(21·삼성증권 후원·세계랭킹 54위)은 한국 테니스의 간판스타로 성장했고, 마침내 한국 선수로는 14년 10개월 만에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대회 정상에 올랐다.

정현은 1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ATP 투어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대회 결승에서 안드레이 루블레프(37위·러시아)를 3대 1(3<5>-4 4-3<2> 4-2 4-2)로 격파하고 자신의 첫 투어 대회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정현의 종전 최고 성적은 지난 5월 BMW오픈 4강이었다.

한국 선수가 ATP 투어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것은 2003년 1월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투어에서 이형택(41)이 정상에 오른 이후 14년10개월 만이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정현은 상금 39만 달러(약 4억3600만원)를 거머쥐게 됐다.

이번 대회는 21세 이하 상위 랭커 8명 등 유망주들이 출전했으며 ATP 랭킹 포인트는 없지만 ATP는 공식 투어 대회로 인정하고 있다.

챔피언에 등극한 정현은 세계 테니스를 이끌어 갈 차세대 주자임을 확실히 보여줬다. 이날 결승에서 루블레프에게 1세트를 내줬지만 정현은 날카로운 백핸드를 구사하며 2세트를 잡았다. 이후 경기 주도권을 빼앗긴 루블레프는 신경질적으로 라켓을 던지기도 했다. 침착하게 경기를 운영한 정현은 우승을 확정 짓자 미소를 지었고 양팔을 벌려 들며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정현은 경기 종료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굉장히 어려운 경기였는데 최선을 다했다”며 “우승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좋아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올 시즌 니시코리 케이(22위·일본)와 같은 톱랭커 선수들과 경기를 하면서 좋은 경험을 했던 게 가장 큰 큰 수확이다”며 “다만 부상으로 공백기가 있어 아쉬웠는데 내년엔 부상 없이 투어를 소화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이자 삼일공고 테니스부 감독을 역임한 정석진(51)씨가 정현의 아버지다. 형 정홍(24)도 테니스 선수로 활동 중이다. 정현의 몸속엔 테니스 집안의 유전자가 있는 것이다.

약시를 치유하기 위해 라켓을 잡았던 정현은 재능을 발휘하며 유소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013년 윔블던 주니어 남자단식 준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테니스의 차세대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또 태극마크를 달고서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남자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군 면제까지 받아 테니스에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올해엔 세계랭킹 1위인 라파엘 나달, 아시아 톱랭커 니시코리 등과의 맞대결을 통해 경험을 쌓으며 경기력을 끌어올렸다.

정현은 올 9월엔 개인 최고 랭킹인 44위를 기록했고 지난 6월 열린 프랑스오픈에서는 32강 진출에 성공, 메이저대회 최고 성적을 거뒀다. 한국 남자 선수로서 이형택이 남긴 최고 성적인 세계랭킹 36위와 메이저대회 16강도 정현이 곧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86 서울아시안게임 4관왕인 유진선 의정부시청 테니스팀 감독은 “차세대 선두 주자가 누구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회였다. 우승을 차지한 정현이 2년 후 정도면 세계랭킹 10위권 진입도 충분히 이룰 것이다”고 분석했다. 이어 “체격(신장 188㎝·체중 87㎏)이 좋아지면서 힘이 붙어 공격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체력과 서브만 보완한다면 진정한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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