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현실의 벽에도 예술을 놓지 않은 예인들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공연 중인 음악극 ‘적로’. 아래 사진은 기생 산월이 두 대금 명인 박종기와 김계선 앞에 앉아 있는 모습. 서울돈화문국악당 제공


조선시대 최초로 음악정책을 담당한 정승 박연(1378∼1458)은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음악 재능을 드러냈던 인물이다. 특히 피리와 가야금 연주에 능해서 그가 연주를 할 때면 새와 짐승들이 찾아와 소리에 맞춰 춤을 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 같은 재능은 출세에 그리 보탬이 되지 못했고 그는 과거 급제를 해서 관료가 되었다.

집현전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박연이 다시 음악의 길로 접어든 것은 세종의 혜안 때문이었다. 아직 세자였던 시절 사간원에 근무하는 박연의 음악에 대한 애정과 재능을 간파한 세종은 임금으로 즉위하자마자 박연을 음악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인 관습도감의 제조로 임명해 음악에만 전념토록 한 것이다.

세종의 탁월한 인사와 박연의 적성에 맞는 노력으로 조선은 고유의 음악 이론과 악보와 악기, 그리고 ‘아악’이라는 궁중음악을 보유하게 됐다. 그러나 예술은 즐기면서도 예술가는 천대하는 유교의 이율배반적인 관습은 이런 박연의 성취에 장벽이 됐다. 스스로 음악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인물이었음에도 박연은 “가정 안에서 3현과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 것은 패가의 근원이 될 것이다. 삼가 뜻을 두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다.

개화기를 거치고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조선의 음악은 더욱 고립무원에 빠졌다. 일제는 총과 칼만을 들고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 담론 주입을 통해 조선의 전통예술을 ‘미개한 문명’ ‘음란한 퇴폐문화’로 규정하며 근원적으로 뿌리를 뽑고자 했다. 협률사 원각사 광무대 단성사 등 최초의 근대 극장에서 소개되는 판소리 공연과 창극, 궁중무용들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무대에 올랐던 조선의 예인(藝人)들은 모두 경시청의 감시를 받았다.

조선의 전통예술이 오늘날까지 보전된 것은 이런 녹록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예술을 놓지 못한 운명의 예술가들 덕분이었다. 일제의 탄압 아래 이들은 천민이든 양반 출신이든 타고난 신분의 벽을 넘어서 함께 어울려 음악으로 소통했다.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소박하게 막을 올린 ‘적로’도 바로 이 시대 예인 중 두 명의 대금 명인들의 삶과 노래를 음미하는 작품이다.

천민인 세습무 출신 박종기는 ‘진도 아리랑’을 창작한 인물로 말 그대로 ‘피를 토하는’ 연습을 통해 최고 경지에 이른 명인이었다. 그는 실제로 대금을 연주하다가 각혈하며 숨을 거뒀다고 한다. 가난한 양반집 자제 김계선은 궁중 악사의 신분으로 민요와 같은 세속 음악을 연주하던 이단아였다. 하지만 워낙 고고한 인품 탓에 아무도 그의 시도를 나무라지 못했고, 그의 연주와 더불어 서민들의 민요는 예술적 경지를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조선의 음악을 놓지 못한 그들의 삶을 ‘애국심’이라는 얄팍한 껍데기로 포장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적로’는 관람할 가치가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업을 선택하고,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그 업을 터득한 뒤, 그 업을 통해 인간의 ‘도(道)’를 추구한 이들의 노력은 민족주의라는 시한부 관념을 초월한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악기의 속이 비어있듯, 사람도 비워야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라는 김계선의 명언은 그들이 음악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명인들의 삶이 선사하는 공허한 정취로 더욱 아름다움이 깊어가는, 만물이 스러져가는 가을이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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