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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자살 국정원 변호사, 檢조사 3일 뒤 “다 뒤집어쓸 분위기” 死色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정치공작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는 추명호(54)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 출석하고 있다. 영장이 재청구된 추 전 국장은 이날 결국 구속수감됐다. 뉴시스




“너무 힘들다” 심경 토로 후
“잘 지내시라” 죽음 암시도

당시 방해공작 주도한
파견검사들이 수차례 전화


정모(42) 국가정보원 법률보좌관실 변호사는 지난달 23일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지 7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검찰 조사 이튿날 동료들에게 “저는 한두 번만 더 가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뭐 저희를 강도 높게 조사했겠어요”라며 가벼운 농담도 나눴다. 정 변호사는 책임질 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실무자였다.

그러던 그가 조사 사흘 후엔 사색이 된 얼굴로 출근했다. 정 변호사는 동료들과 산책을 하면서 억울한 심경을 토로했다. “너무 힘듭니다. 제가 지금 책임지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 같아요. 제가 다 뒤집어써야 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어요.”

그런 그에게 동료들은 “그 사람들(당시 파견검사)이 죗값을 치르면 되는데 왜 네가 모든 걸 책임진다고 생각하느냐”며 “책임질 일 전혀 없다. 너한테 지시한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지. 지시한 대로 했는데 무슨 책임을 지려고 하느냐. 오버하지 마라”고 다독였다.

정 변호사가 “잘 지내세요”라며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자 검찰에서 파견 나온 한 검사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며 타이르기까지 했다. 정 변호사는 이 무렵 국정원의 검찰 수사 방해 공작을 주도한 옛 파견검사들과 수차례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변호사가 다음 날 하루 휴가를 내자, 그런 그를 걱정하던 동료들은 행선지를 전화로 알려 달라고 했다. 정 변호사는 29일 오후 2시로 예정돼 있던 2차 조사도 30일로 하루 미뤘다.

정 변호사는 28일 강원도 원주에서 고교 동창을 만났다. 그는 “요새 회사일로 너무 힘들다. 옷을 벗고 나와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음료수를 한 병 시켜서 반병도 못 마셨다. 그는 “힘들어 보인다. 자고 가라”는 친구의 말을 뒤로 한 채 강릉으로 떠났다.

29일 오전 7시에 정 변호사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졌다. 정 변호사는 이날 오전 9시30분 강릉 주문진 해변에 있는 다리에서 투신했다. 바닷물에 빠진 그를 행인이 신고했고 해양경찰이 구조했다. 해경은 2시간가량 휴식을 취하게 한 뒤 돌려보냈다. 정 변호사가 가족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같은 날 오후 5시47분 강원도 춘천 인터체인지(IC)로 들어가는 모습이 CCTV 화면에 잡혔다. 정 변호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국정원 동료들은 30일 오전 정 변호사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며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변호사의 형 정모씨가 경기도 고양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다. 30일 밤 정 변호사가 숨진 채 발견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 그의 그랜저 승용차에는 블랙박스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사망에 이르게 한 번개탄을 언제, 어디서 샀는지도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시신으로 발견된 지 사흘 만인 2일 경찰은 그가 홀로 살던 오피스텔을 유족과 함께 찾았다. 정씨는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했던 동생이니 유서를 남겼을 것”이라 말했지만 유서는 없었다. 개인 컴퓨터 안에도 자살을 짐작케 하는 단서는 없었다. 정 변호사는 국정원과 가까운 경기도 과천에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방을 얻어 살았다. 가족들에게도 정확한 주소를 알리지 않았다. 그의 오피스텔엔 당장이라도 출근할 수 있을 것처럼 세탁된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 그는 검찰 조사 후 가족들에게 전화 한 통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글=신훈 기자 zorba@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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