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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컴퓨터에 당한 첫 패배를 복기하다… “졌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30년간 세계 체스계를 주름 잡았던 가리 카스파로프. 그가 슈퍼컴퓨터 딥블루와의 체스 대결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카스파로프는 “도망친 챔피언으로 기억되는 걸 원치 않았다. 물론 사회적 관심이나 상금에도 욕심이 났다”고 적었다. 어크로스 제공




슈퍼컴퓨터 ‘딥블루’와의 대결
다른 차원의 지능을 만났다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비관 대신 희망을 말하려 한다
인간이 꿈꾸기를 멈출 때
우리는 정말 기계에 패배할테니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 남자를 인류 최초의 패자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듯하다. 남자는 1997년 5월 인간을 대표해 인공지능(AI)과의 싸움에 나섰지만 무참하게 무너졌다.

남자의 이름은 가리 카스파로프(54). 세계 체스 챔피언이었던 그는 IBM이 만든 슈퍼컴퓨터 ‘딥블루’와의 체스 경기에서 무릎을 꿇었다. ‘딥 씽킹’은 카스파로프가 그때의 경기를 복기한 기록이자 인류의 미래까지 내다본 신간이다. 그는 자신의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 대결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담은 최초의 고백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회고다.”

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카스파로프가 ‘딥 씽킹’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책에 담긴 문장을 그대로 갖다 쓰려고 했지만 문맥에 맞게 수정한 부분도 많다. 설명이 부족하거나 애매하게 느껴진다면 책을 사서 읽으시길. 인간과 AI와의 관계를 되새기면서 올가을 ‘깊은 생각(Deep Thinking)’에 빠질 수도 있을 테니까.

-한국 독자들은 카스파로프가 얼마나 대단한 체스 기사였는지 잘 모른다.

“나는 옛 소비에트연방(소련)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체스를 뒀다. 소련에서는 체스가 국민 게임이다. 스물두 살이던 85년,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2005년 은퇴할 때까지 랭킹 1위였다. 어떤 이들은 한때 ‘역대 최고의 IQ’라는 가짜 리스트를 만들어 나를 아인슈타인과 ‘동급’에 올려놓기도 했다. 은퇴한 뒤에는 강연이나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현재는 영국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체스를 두는 컴퓨터, 일명 ‘체스 기계’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60년대 체스 기계는 초보자 수준이었다. 70년대 들어 실력이 급성장하더니 90년대엔 나를 무너뜨렸다. 아이들이 쑥쑥 성장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속 400㎞ 서브를 넣는 테니스 선수가 백핸드가 약하다고 승패를 걱정할 리 있겠나. 체스 기계의 수준이 이와 비슷하다.”

-딥블루와 상대했을 때 느낌이 어땠나.

“96년 딥블루와 처음 맞붙었을 땐 이겼었다. 물론 쉽지 않은 경기였다. 게임을 마친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새로운 차원의 지능이 앉아있는 것 같았다고. 이듬해 딥블루와 다시 만났을 땐 도무지 싸울 마음이 안 생기더라. 컴퓨터는 상황이 유리하다고 우쭐대지도, 불리하다고 실망하지도 않는다. 화장실에 갈 필요도 없다. 경기에서 패한 뒤 난 재대결을 원했지만 IBM이 거부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의 바둑기사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봤을 것이다. 관전평이 궁금하다.

“흥미진진했다. 알파고는 더 나은 수를 두는 방법까지 스스로 학습했다. 딥블루의 시대가 저물고 알파고의 시대가 열리는 것 같았다.”

-인간이 컴퓨터보다 나은 건 무엇인가.

“컴퓨터는 해답을 얻는 데는 최상의 도구다. 하지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에 대해선 잘 모른다. IBM의 개발자 중 한 명도 이런 말을 하더라. 컴퓨터는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알고는 있지만 어떤 질문이 중요한지는 모른다고.”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기계가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술이 인류에 해를 입힌다? 난 여기에 동의하진 않는다.”

-이유가 궁금하다. AI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하더라. AI에 대한 우려는 화성의 인구 과잉 문제를 미리 걱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미래를 바라보는 비관적 시선은 문명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신기술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신기술의 가능성, 젊은 세대의 역량을 믿어야 한다. 꿈꾸기를 멈출 때 우리 역시 기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안전장치와 더불어 용기가 필요하다. 20년 전 딥블루와 마주 앉았을 때, 낯설고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여러분도 앞으로 무인 자동차에 처음 오를 때, 컴퓨터 상사로부터 처음으로 업무 지시를 받을 때,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충격에서 수용으로 넘어가는 흥미로운 시간 동안 우리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이길 수 없다면 함께 가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밖으로, 위로,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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