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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환자 병명도 모른 채… 아찔한 병실 청소

캐런 메싱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을 거론하면서 가장 먼저 병원의 청소 노동자들을 언급한다. 그는 “외롭고 아픈 노인 환자와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바로 청소 노동자다. 이들은 병실에서 환자들과 함께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훈련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나는 청소 노동자들이 그런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뉴시스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이라는 책을 아시는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지난 6월 펴낸 이 책은 인상적인 신간이었다. 필자들은 산업재해 현장을 누비는 직업환경의학 분야의 전문의나 활동가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건 잇속만 챙기려는 기업들의 행태를 고발하면서 허술한 법망의 문제점을 도마에 올렸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이런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다. “자본의 본질은 고장 난 노동자들의 몸에 새겨진 흔적을 통해 밝혀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고통’을 소개하기 전, 저 책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은 건 두 책이 서로 관련이 있어서다. ‘보이지 않는 고통’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출판사에 출간을 제안하면서 국내 독자와 만나게 됐다. 책에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노동자의 삶을 통해 야멸찬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려한 한 인물의 ‘분투의 기록’이 실려 있다.

주인공은 캐나다의 여성 과학자 캐런 메싱(74)이다. 30대 초반까지 그의 삶은 평탄했다. 생물학을 공부하는 평범한 학자였다. 하지만 1978년 한 제련공장의 노동자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달라졌다. 노동자들은 방사성 분진을 흡입한 탓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이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노동 현장의 참혹한 실태를 마주한다.

이 정도까지만 들으면 저 뒤에 등장할 스토리를 이렇게 짐작하기 쉽다. 저자의 노력 끝에 이런저런 개선안이 만들어졌고, 노동자의 건강 상태는 호전됐다고. 하지만 예상은 빗나간다. 경영진은 환기 시스템을 개선하는 선에서 갑자기 모든 연구를 중단시켰다. 저자를 비롯한 학자들은 연구를 진행하던 노동 현장에서 “쫓겨났다”는 게 저자의 전언이다.

차례로 이어지는 내용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은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이다. 자본이 조종간을 잡은 세상에서 노동자를 편드는 연구를 진행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런 프로젝트를 가동하려 했을 때 연구비를 받아내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지 확인할 수 있다.

남성이 아닌 여성 노동자가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주로 거론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책에는 진종일 서서 일하는 은행원이나 백화점 직원, 마트 계산원의 삶이 담겨 있다. 병원의 청소 노동자를 다룬 챕터도 인상적이다. 여기에 실린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은 환자로부터 전염될 가능성을 불안해했는데, 환자 정보에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평가할 수조차 없었다. 어떤 노동자들은 몇 주 동안 입원실을 청소한 뒤에야 그 방에 ‘격리’라는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허투루 다루는 과학계 관행을 질타하는 내용도 비중 있게 실려 있다. 키워드는 ‘공감 격차(Empathy Gap)’라고 명명한 개념이다. 학계의 백면서생들은 노동자의 삶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저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감이란 과학자에게 높게 평가되는 특성은 아닌 것 같다. 과학자들은 노동자에게 귀 기울이라고 배우지 않는다. 사실 과학자들은 노동자들에게 귀 기울이지 ‘말라’고 배운다는 편이 정확하다. 노동자에게 공감하는 과학자들은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셈이다.”

책을 읽고 나면 노동자들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본문 끄트머리엔 이런 내용이 등장하는데, 책을 숙독한 독자라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문장이다. “고통 받는 사람의 필요에 집중하는 직업보건 연구를 북돋는 것이 결국 대중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기 바란다. 과학자들 역시 지역사회 연구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과학이 다른 어떤 연구보다 가능하지 않았던 귀한 결과의 원천이 될 수 있었음을 이해하길 바란다.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지식과 노력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희망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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