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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스트레스의 역설

한 관객이 2009년 미국 현대미술관 모마(MoMA)에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오른쪽)와 마주 보고 있다.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퍼포먼스다. 침묵을 유지하며 마주보는 것은 매우 스트레스 받는 일이지만 1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이 ‘고문’을 자청했다. 모마 홈페이지




“스트레스는 무익하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스트레스는 가능한 빨리 풀어야 한다”….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그런데 독일의 과학전문기자 우르스 빌만이 갑자기 “스트레스는 생활필수품이자 인생의 선물”이라는 뚱딴지 같은 주장을 편다. 먼저 스트레스의 정의부터 바로 잡는다. 일상에서 우리는 심리적 과부하와 그 반응만을 스트레스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스트레스의 순기능을 무시하게 만든다고 한다. 스트레스란 ‘생명체의 스트레스 시스템 활성화’라는 게 객관적이라는 거다.

그는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스트레스가 면역계를 활성화하고 사고력을 높여준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 스탠퍼드대 정신병리학자 피르다우스 디바르가 쥐 60마리를 대상으로 한 자외선 실험이 우선 소개된다. 쥐 30마리는 자외선에 노출시키기 전에 2시간30분간 좁은 유리관에 가둬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 나머지 30마리는 평상시대로 뒀다.

이후 4∼6주간 주기적으로 쥐들에게 강한 자외선을 쐈다. 그 결과 많은 쥐의 피부에 악성종양이 생겼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았던 쥐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쥐보다 종양이 적게 생겼고 암 발생 시점도 훨씬 늦었다. 디바르는 이 실험을 근거로 “단기 스트레스는 생명체의 면역력을 높여준다”고 설명했다. 일상적인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이 비자발적 실업자보다 더 활력 있고 병치레가 적다는 걸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수긍된다.

스트레스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높여주기도 한다. 빌만은 시험 전 날 ‘벼락치기’ 공부를 할 때 막강한 집중력이 발휘되는 것을 손쉬운 예로 든다. 스탠리 큐브릭의 공포 영화, 예술가의 고문 퍼포먼스, 살인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 등은 스트레스를 주지만 동시에 쾌감을 주기도 한다. 스트레스의 양면성이다. 빌만은 이런 흥미로운 자료와 사례를 바탕으로 스트레스의 이로움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스트레스의 일면만 강조하는 건 아니다. 장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우 여러 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경고한다. 하지만 그는 2014년 독일 공공의료보험조합 조사를 바탕으로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지속적 경쟁, 조직 내 따돌림, 상사와 불통 등과 같은 만성 스트레스가 질병의 원인”이라고 한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고 하는 직장인의 하소연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처럼 읽는 내내 책 속 통계와 사례를 현실에 대입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나쁜 환경은 우리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책 속에 나온 아래 연구를 참고할 만하다.

미국 위스콘신대 연구진은 1998년 스트레스 관련 설문에 응한 성인 2만9000명을 8년 뒤에 다시 조사했다. 응답자 중 사망 신고된 사람들의 답변을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사망률이 가장 낮은 집단은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는다’고 한 이들일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론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들이었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스트레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야 오래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캐나다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는 “죽은 사람만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거꾸로 말하면 스트레스는 생명의 증거다. 빌만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 받는 것이라면 스트레스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자세를 바꾸자고 한다. 다소 무책임해보일 수 있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일상적인 격언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스트레스의 이점을 알려주고 활용법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이 책의 유익은 상당히 클 것 같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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