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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노석철] 노영민 대사의 중국 인식



“중화민족의 피에는 남을 침략하거나 세계를 억눌러 제패하려는 유전자가 없다. 중국은 2100여년 전 실크로드를 개척해 문명교류의 족적을 남겼고, 600여년 전 정화가 함대를 이끌고 30여 개국을 방문하면서도 한 치의 땅도 점령하지 않았다. 중국의 근대사는 재난의 역사이며 비참한 역사였다. 중국인은 비참한 역사를 다른 민족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4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국제우호대회 연설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일본의 군사 대국화 움직임을 비판하면서 중국 패권주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차원으로 해석됐다. ‘중화민족은 침략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는 중국의 주류인 한족 중심의 사고가 깔려 있다. 몽골의 원이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몰라도 최소한 한족의 역사에선 침략이 없다는 논리다.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이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는 구호를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중국의 침략을 수없이 받은 주변국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역사인식이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했고, 고구려는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냈으나 결국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에 멸망했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까지 삼키려고 계속 전쟁을 했다.

동남아시아의 베트남도 중국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렸다. 1000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은 938년 독립했지만 중국 왕조들은 베트남을 계속 괴롭혔다. 송,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수많은 침략을 당하면서도 끈질긴 항전으로 살아남았다. 중국은 1979년 20만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을 침공했다가 29일 만에 철수하기도 했다. 과거 청나라의 위구르·티베트 정복도 중국의 역사다.

노영민 신임 주중 한국대사는 지난달 29일 외교부 기자간담회에서 시 주석의 표현대로 “중국에는 침략의 유전자가 없다”면서 “중국 역사 5000년간 한족이 지배한 통일왕조는 주변국을 영토적으로 복속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유일하게 영토 욕심을 취한 몽골족의 원과 만주족의 청 외의 왕조들의 경우 만리장성 비용의 10분의 1만 군사비로 투입했다면 주변 민족을 다 복속시키고도 남았다”고도 했다.

노 대사가 중국을 향해 미리 맞춤형 발언을 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의 발언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기엔 꺼림칙하다. 한족이 침략을 안했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중국의 침략을 받았던 역사도 부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 멸망시킨 것도 침략이 아니고, 중국 역사의 일부인 ‘내전’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그건 지난 4월 시 주석을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는 중국 역사의 일부였다고 하더라”고 한 말에 동조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노 대사 발언의 행간을 보면 사드 배치 문제로 꼬인 한·중 관계와 북한 핵 문제 등을 어떻게든 풀어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굴기와 중화패권주의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노 대사의 ‘친중국’ 화법이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중국이 주변국과의 평화발전을 주창하지만 자국의 핵심이익과 맞물리면 절대 양보하지 않고 힘으로 누르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신(新)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추진하면서도 주변국과 계속 충돌하고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대만 등과 대립하고, 인도와는 여전히 영토분쟁이 진행 중이다. 중국의 자국 이기주의 탓에 주변에 친구가 없다는 비판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특히 집권 2기를 맞아 시 주석의 1인 권력이 강화되면 대외적으로도 힘의 논리가 더욱 강화될 것이란 우려도 없지 않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내세운 시 주석의 ‘중국몽(夢)’ 구호가 주변국들에 달갑지 않은 이유다. 엄중한 시기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노 대사가 중국의 평화 유전자를 어떻게 이끌어낼지 궁금하다.

베이징=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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