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10월혁명 100주년이 한반도에 묻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는 평생을 러시아혁명사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여러 저서 중에서 특히 총 14권에 이르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1917∼29)는 그가 1950년부터 79년까지 약 30년에 걸쳐 펴낸 대표적 역작이다.

그의 시각은 당대의 러시아혁명사 연구와 결이 좀 달랐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19세기부터 이어진 자생적 봉기의 연장선에서 이해했다. 제정 러시아의 붕괴 이유도 레닌 등 혁명의 최전선에 섰던 이들의 리더십과 함께 차르(황제)의 실정과 개혁 부재에 대한 대중의 염증이 확산된 데 있다고 봤다. 대중이 혁명의 주역이라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1905년과 17년에 1, 2차 혁명을 겪었다. 1차 때 입헌군주제를 이뤘고, 2차에 비로소 큰 성과를 냈다. 2차 혁명은 차르를 몰아낸 2월 혁명과 이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10월 혁명으로 나뉜다. 10월 혁명은 오는 25일로 100주년을 맞는다.

그런데 대체 왜 지금 10월 혁명인가.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지만 그렇게 등장한 현실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은 91년 지구상에서 소멸되지 않았던가. 사회주의를 특별히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한갓 역사적인 관심거리에 불과할 뿐, 10월 혁명은 우리와 별 관계도 없는 타국의 역사가 아닌가.

과연 그럴까. 10월 혁명은 분명 실패한 역사인데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한반도에 중대한 숙제를 던지고 있다. 첫째 북한 정권과 관련된 문제다. 북한은 김씨 세습 왕조체제로 전락했지만 그 뿌리는 10월 혁명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북한의 유사(類似) 사회주의도 10월 혁명이 거쳐간 것처럼 몰락의 길로 전개될 것인가.

카가 주장한 대로 10월 혁명은 초기 물질적 토대가 취약한 가운데 빠르게 진행된 혁명인 탓에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혁명은 강제와 강압적 통치만 남았다. 그 와중에 레닌의 평등주의·국제주의는 좌절됐고, 24년 그가 죽은 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철권통치의 독재적 국가사회주의로 치달았다.

혁명은 10년도 안 돼 사실상 변질되기 시작했으나 식민지·반식민지 하의 수많은 지성들은 오랫동안 10월 혁명을 교본으로 삼았고 조국의 해방과 인민대중의 평안을 꿈꾸며 그에 심취했다. 식민지 조선이 그랬고 중국 또한 그러했다. 일부 서구 지식인들의 경우도 사회주의의 이상에서 인류의 비전을 보았기에 10월 혁명을 지지했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몰락의 조짐을 그나마 앞서 간파한 중국은 일찌감치 수정주의로 탈바꿈한 채 오늘에 이르렀는데 북한은 그마저도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이를 북한만의 문제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바로 여기에 10월 혁명이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는 두 번째 숙제가 있다. 그것은 혁명의 출발선상에 제기된 약자와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다.

10월 혁명을 상징하는 소비에트는 보통 혁명의 주체들이었던 노동자·농민·병사들의 평의회를 뜻한다. 일본의 러시아사가인 시모토마이 노부오 교수는 소비에트가 원래 17세기 러시아정교에서 예식 문제로 배제된 분리파(raskolniki·古儀式派)가 탄압을 피해 모인 비밀 예배공동체였다고 본다(‘러시아와 소련-역사에서 사라진 이들’, 2013).

레닌 등은 비밀리에 모임을 꾸려가야 했기에 소비에트를 활용했고, 고의식파도 차르 체제의 억압과 도탄에 빠진 신도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혁명가들을 힘써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는 자연스럽게 10월 혁명의 근거조직으로 뿌리내리게 됐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에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 배경을 이루는 본질은 약자와 고통 받는 자에 대한 공감이라고 본다. 식민지 한반도에서 혁명을 꿈꿨던 이들의 의식이나 복음의 실체에 대한 기대감에 충만했던 교회의 존재감은 근본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둘은 다른 모습으로 내달리고 있다. 외세의 힘으로나마 혁명을 실현하려 했던 북한은 실패한 혁명을 부여잡고 핵과 미사일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남한의 교회는 100년 전 고의식파가 제기한 문제들을 끌어안기보다 되레 그에 대한 관심에서 나날이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남한의 교회가 본질 문제에 좀 더 매진했더라면, 약한 자와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철저하게 다졌더라면 어쩌면 그 여파로 북한의 어깃장도 지금처럼 심각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때마침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한반도의 숙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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