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장이 관념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삶과 피와 영혼을 보여주는구나 하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원작 소설을 쓴 김훈 작가는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을 관람한 뒤 이런 평을 내놓았다. 깊숙이 감춰뒀던 메시지를 정확히 포착해 살뜰히 재현해낸 작품에 대한 격찬이었다.
영화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와 신하들이 겪어내야 했던 혹한의 47일을 그린다. ‘살기 위한 길이 무엇이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 두 인물이 극의 중심이다. 이조판서 최명길 역의 이병헌(47)과 예조판서 김상헌 역의 김윤석(49). 명불허전의 연기로 묵직한 울림을 전한 두 배우를 최근 서울 종로구의 카페에서 각각 만났다.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이병헌은 “관객은 과연 누구의 편을 들까 궁금하다”고 운을 뗐다. “보통 영화를 보면 한쪽으로 입장이 치우치게 되는데 ‘남한산성’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잖아요. 상반된 논리와 소신을 가졌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같았던 두 충신의 이야기가 굉장히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 최명길을 연기한 그는 “감독이 흥행 공식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만의 호흡으로 차분하고 용기 있게 영화를 만든 점이 좋았다”며 “좋은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안도감을 줬다”고 말했다.
극 중 인조(박해일) 앞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이 설전(舌戰)을 벌이는 장면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사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신경전은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김윤석씨의 연기는 예측할 수가 없더라고요. 매 테이크마다 표현법이 달랐죠. 불같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긴장을 놓지 않으려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현 한반도 정세를 고려했을 때, 380년 전 치욕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르겠다. 이병헌은 “영화 속 이야기가 공교롭게도 현 상황과 맞닿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 껴서 힘센 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난 정치는 못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만인의 목숨을 놓고 위험천만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선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걸 느꼈죠. 그렇지 않아도 저는 원래 ‘결정 장애’가 있어서(웃음). 무거운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백성을 끌고 가는 건 정말 대단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더군요.”
“오랑캐에게 삶을 구걸하느니….”
‘남한산성’은 김윤석이 데뷔 29년 만에 처음 도전한 전통사극이다. 결사항전을 외친 척화파의 수장 김상헌 역을 맡은 그는 이 작품에 임하면서 “즐거운 부담”을 느꼈다. “좋은 작품을 만날 때는 언제나 부담이 뒤따르지만 그 정도의 부담감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기왕 사극을 한다면 클래식한 정통사극을 하고 싶었어요. 만족스럽게도 딱 그런 작품을 만난 거죠. 지금 제 나이에 이 역할을 맡은 것 또한 굉장히 좋은 타이밍이었던 것 같아요.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이었고요. 목숨을 내놓고 절개를 지키는, 요즘 이런 사람 보기 힘들잖아요.”
두 주연 말고도 박해일 고수 박희순 조우진 등 쟁쟁한 출연진이 함께한 작품. 배우 개개인의 능력은 물론 이들의 함께 이루는 시너지가 중요했다. “100억원 넘는 제작비를 들여 격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야기하는 작품이었기에 이 정도 캐스팅은 기대했습니다. 캐스팅 과정을 지켜보면서 ‘좋은 그림이 나오겠구나’ 싶었죠.”
이병헌의 덕담을 전해들은 김윤석은 “나보고 왜 불같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 “이병헌씨는 굉장히 진지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화답했다. 설전 장면 촬영 당시에는 리허설도 거의 없었단다. “우리는 서로 ‘내 논리만 굽히지 말자’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합을 짜기보다) 느껴지는 대로 가는 거죠. 어떠한 계산도 없이.”
김윤석은 “최명길과 김상헌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둘이 똑같았다”면서 “그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있었다. 당시 혼란한 상황에 자기 논리를 가지고 절개를 지킨 이가 두 사람뿐이었다는 걸 서로가 알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