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여름이었다. 남자는 한 복지단체 운영위원 자격으로 한국의사협회 건물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포괄수가제 도입을 촉구하는 행사였다. 그런데 당시 남자는 포괄수가제가 어떤 제도인지 몰랐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에야 동료에게 그 뜻을 물었다.
“질환별 의료비 정찰제 정도로 이해하면 돼.”
저렇게 간단한 답변을 들으니 포괄수가제의 뜻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A병으로 투병하는 환자는 B병원에 가든, C병원에 가든 같은 병원비를 내는 제도. 남자는 동료의 답변을 들은 뒤 생각했다. ‘포괄수가제라는 말 대신 의료비 정찰제라는 말을 썼다면 국민들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 의사협회는 반대의 뜻을 밝힐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남자의 이름은 이건범(52). 그는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를 이끌며 쉬운 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줄기차게 전개해왔다. ‘언어는 인권이다’에는 저자가 2000년부터 이 단체에서 일하며 느낀 소회와 우리말에 대한 진한 사랑이 담겨 있다.
저자가 전하려는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책의 제목 ‘언어는 인권이다’로 갈음할 수 있다. 올바른 언어 사용이 공동체의 인권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지탱한다는 것인데, 독자에 따라서는 진부하게 여길 수도 있는 메시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우리말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 저자가 주도한 ‘한글운동’의 현주소도 확인할 수 있다.
들머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말이 생명과 직결된다는 내용이다. 지하철역에 설치돼 있는 심장충격기가 대표적이다. 심장마비 등으로 응급 상황에 처한 시민의 심장 박동을 되살려주는 이 장비는 지난달 정부가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제세동기’로 불렸다. 엔간한 시민은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든 용어였다. 저자는 “정부 등 공적 기관이 정하여 사용하는 공공언어 가운데 어려운 말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고 강조한다.
쉬운 말을 쓰면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주장도 비중 있게 실려 있다. 저자는 “어려운 말은 어려운 이의 어려움을 더 키운다”고 적었다. 한국인이 왜 토박이말을 허투루 여기게 됐는지, 무슨 까닭에서 외국어를 남용하게 됐는지 역사적으로 살핀 내용도 주목할 만하다.
인상적인 주문이 많다. 아이들이 우리말의 ‘말맛’을 느끼면서 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도록 국어 교육을 바꿔야 한다거나 법률 용어를 쉬운 말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 외국어를 남용하는 일을 경계하자는 내용이 차례로 등장한다. 특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서 사회적 차별을 강화하게 만드는 단어가 많다는 지적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차별을 은폐하려는 용어 사용은 오히려 차별을 더 강화한다. ‘다문화주의’가 중요하다면서 여기저기서 다문화, 다문화를 떠들다 보니까 어느새 ‘다문화’는 외국 이주민 가족의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분명하게 정체를 알려 주는 ‘이주민 가족’이라 부르는 게 이들에게 필요한 사랑과 도움을 끌어내는 데에 더 유리하다.”
올바른 언어생활을 주문하는 저자의 태도가 너무 깐깐하게 보일 수도, 까칠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런 저자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독자들은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는 말이, 관공서나 회사에서 사용하는 글이 얼마나 조잡한지 실감할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