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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쉬운 말을 쓰면 삶이 행복해지나니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한글날을 앞두고 펴낸 ‘언어는 인권이다’는 우리말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드는 신간이다. 그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언급하면서 “세종의 민본정신을 요즘 말로 풀어보라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인권 의식’이라고 답하고 싶다. 한글은 인권이다”고 적었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픽사베이 제공




5년 전 여름이었다. 남자는 한 복지단체 운영위원 자격으로 한국의사협회 건물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포괄수가제 도입을 촉구하는 행사였다. 그런데 당시 남자는 포괄수가제가 어떤 제도인지 몰랐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에야 동료에게 그 뜻을 물었다.

“질환별 의료비 정찰제 정도로 이해하면 돼.”

저렇게 간단한 답변을 들으니 포괄수가제의 뜻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A병으로 투병하는 환자는 B병원에 가든, C병원에 가든 같은 병원비를 내는 제도. 남자는 동료의 답변을 들은 뒤 생각했다. ‘포괄수가제라는 말 대신 의료비 정찰제라는 말을 썼다면 국민들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 의사협회는 반대의 뜻을 밝힐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남자의 이름은 이건범(52). 그는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를 이끌며 쉬운 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줄기차게 전개해왔다. ‘언어는 인권이다’에는 저자가 2000년부터 이 단체에서 일하며 느낀 소회와 우리말에 대한 진한 사랑이 담겨 있다.

저자가 전하려는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책의 제목 ‘언어는 인권이다’로 갈음할 수 있다. 올바른 언어 사용이 공동체의 인권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지탱한다는 것인데, 독자에 따라서는 진부하게 여길 수도 있는 메시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우리말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 저자가 주도한 ‘한글운동’의 현주소도 확인할 수 있다.

들머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말이 생명과 직결된다는 내용이다. 지하철역에 설치돼 있는 심장충격기가 대표적이다. 심장마비 등으로 응급 상황에 처한 시민의 심장 박동을 되살려주는 이 장비는 지난달 정부가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제세동기’로 불렸다. 엔간한 시민은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든 용어였다. 저자는 “정부 등 공적 기관이 정하여 사용하는 공공언어 가운데 어려운 말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다”고 강조한다.

쉬운 말을 쓰면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주장도 비중 있게 실려 있다. 저자는 “어려운 말은 어려운 이의 어려움을 더 키운다”고 적었다. 한국인이 왜 토박이말을 허투루 여기게 됐는지, 무슨 까닭에서 외국어를 남용하게 됐는지 역사적으로 살핀 내용도 주목할 만하다.

인상적인 주문이 많다. 아이들이 우리말의 ‘말맛’을 느끼면서 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도록 국어 교육을 바꿔야 한다거나 법률 용어를 쉬운 말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 외국어를 남용하는 일을 경계하자는 내용이 차례로 등장한다. 특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서 사회적 차별을 강화하게 만드는 단어가 많다는 지적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차별을 은폐하려는 용어 사용은 오히려 차별을 더 강화한다. ‘다문화주의’가 중요하다면서 여기저기서 다문화, 다문화를 떠들다 보니까 어느새 ‘다문화’는 외국 이주민 가족의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분명하게 정체를 알려 주는 ‘이주민 가족’이라 부르는 게 이들에게 필요한 사랑과 도움을 끌어내는 데에 더 유리하다.”

올바른 언어생활을 주문하는 저자의 태도가 너무 깐깐하게 보일 수도, 까칠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런 저자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독자들은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리는 말이, 관공서나 회사에서 사용하는 글이 얼마나 조잡한지 실감할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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