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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전석운] 트럼프와 김정은, 말의 전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벌이는 ‘말(言)의 전쟁’이 위험 수위로 치닫고 있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미국의 전략폭격기가 수시로 한반도로 출격하는 상황이 두 사람의 거친 설전과 맞물려 또 다른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혹시라도 말에서 그치지 않고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로 치닫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감추기 어렵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서로 상대를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김 위원장을 ‘자살행동을 하는 로켓맨’이라고 조롱했다. 같은 연설에서 ‘북한의 도발에 방어해야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시킬 것’이라는 극단적인 발언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단호한 대응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김정은에 대한 조롱이 지나쳤다는 비판이 많았다. 미치광이 이론이나 억지 전략에 충실했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전략적 판단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22일 트위터를 통해 “북한 주민을 굶주리게 하거나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김 위원장은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발끈한 김 위원장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그를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맞받아치며 “불로 다스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북한 이수용 외무상은 뉴욕에 도착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을 “개소리”라고 비하했고, 사흘 뒤 자신의 유엔총회 기조연설도 트럼프 대통령을 ‘과대망상 정신이상자’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미국 내 전문가들은 대체로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조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걸프 전쟁을 수행할 당시 미 합참의장을 지낸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도 미시간대 강연에서 “지도자들을 모욕하는 것은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포함한 일부 참모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조롱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며 반대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다루는 태도를 우려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전문가들뿐만이 아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ABC 방송이 24일 공동으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3명 중 2명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사적 옵션을 강조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안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 문제를 다루는 트럼프 대통령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반응이 42%에 달했다. ‘군 통수권자로 신뢰한다’는 반응은 37%에 불과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상호 비방전은 두 사람의 불같은 성격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두 사람 다 자아가 강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모욕을 못 견디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의 비난전으로 북한이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나올 가능성은 더욱 멀어졌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이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인신공격하면서 보복까지 운운하자 양국 정부의 반관반민 대화 채널인 1.5트랙 대화도 단절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무엇보다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이 상호 개인적인 비난전에 몰두하면서 한국 정부와 지도자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미 갈등이 고조되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남북대화 제의는 북한으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시로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강조하면서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는 문 대통령의 입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한·미동맹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 대통령의 대북 발언에 토를 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잇단 발언은 지켜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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