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살아있는 날들의 축제, 발리, 우붓

황주리 그림


무슨 영화에선가 “살아있네” 하는 말이 유행이 되어, 많은 사람이 그 억양을 흉내 내던 시절이었다. 활어나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바로 그 느낌이었을 것이다.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밤바다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살아있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흔히 발리를 볼 것은 없고 신혼여행에 적합한 휴양의 장소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발리는 ‘먹고 마시고 기도하라’는 영화제목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생각보다 볼 곳도 느낄 곳도 많은 곳이다.

여행은 마음의 막다른 골목을 큰길로 인도해준다. 새벽에 눈을 뜨니 아름다운 바다가 꿈처럼 출렁였다. 호텔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꿈처럼 화려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전날 밤 예약했던 택시를 타고 발리 섬 구경에 나섰다. 발리는 뛰어난 휴양지일 뿐 아니라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그림과 예술 활동이 꽃피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찬란한 문화 예술을 꽃 피우고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발리의 ‘몽마르뜨’라 불리는 ‘우붓’은 수많은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스튜디오를 갖고 작품을 하는 곳인 동시에, 수많은 작품을 팔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부처상과 인간상, 갖가지 모양의 동물 조각상이 내 눈을 끌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조각들이 많았는지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오십 프로 이상 깎아서 조각품 몇 개를 샀다. 쇼핑이 즐거운 곳 또한 발리다. 눈앞에 펼쳐지는 계단식 논들과 곳곳이 그저 뉘 집 뒷마당 같은 사원들로 이루어진 우붓은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 가장 번성했던 ‘기안야르’ 왕 시절에 유럽인들이 모이면서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된 우붓에서, 해질녘 석양을 바라보며 산책로를 걷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우붓의 골목길들에는 수많은 예쁜 카페들이 숨어있다. 시간이 있다면 한 곳씩 다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다 다르다. 자연과 도시가 하나인 곳, 우붓의 ‘뜨가랄랑’ 계단식 논들의 풍경은 다른 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전생에 마치 이곳에 살았을 것 같은 계단식 논들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면 마치 달나라 카페에 온 기분이 든다.

차 한 잔 마시고 곧장 차를 달려 낀따마니 화산지대 정상에 올라, 안개 속에 아슴푸레 신비한 낀따마니 화산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왜 이제야 왔을까? 오십 중반이 되어 발리를 찾은 나는 이십 년 쯤 전에 누군가와 결혼을 해서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다는 엉뚱한 상상에 빠진다. 어쩌면 전생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 번도 결혼을 해보지 않은 나는 지금도 누군가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결혼 왜 안 했냐고요? 제가 본래 진화된 인간이거든요.” 문득 오래 전 발리로 신혼여행을 떠나와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헤어졌다는 후배가 떠오른다. 쩍하면 이혼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한 번뿐인 삶, 이 차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차로 갈아타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도 그랬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세상일은 정말 정답이 없다. 모두 다 그렇게 밖에는 갈 수 없었던 자기만의 길, 자기만의 생을 살다 갈 뿐이다.

화산 지역을 벗어나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따나롯’ 해상사원이다. 썰물 때는 길이 생기며 밀물 때는 바다와 하나가 되는 따나롯 사원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반짝 해가 났다. 그 유명한 따나롯의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다의 수호신에 대한 존경을 담고 있다는 따나롯 해상사원의 바다는 우리의 서해안 갯벌을 연상시켰다.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빨아들일 듯한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너른 갯벌, 노란색과 연두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진 그림 같은 따나롯 해변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신비로웠다. 여기는 정말 지상일까? 천국 같다.

돌아오는 길은 캄캄한 밤이었다. 우붓이 서울의 삼청동이라면 스미냑은 가로수길이다. 스미냑 해변에 있는 레스토랑 ‘쿠데타’ 앞에서 차에서 내렸다. 모든 관광객이 한번은 들르는 곳, 쿠데타의 정원은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발리의 칵테일을 마신다. 쿠데타를 나와 약간 취한 기분으로 화려한 ‘오베로이’ 거리를 산책했다. 예쁜 옷들과 액세서리를 파는 집들이 이어져 있다. 바다와 도시가 그렇게 가까운 게 신기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저녁, 시내에 있는 꾸따 해변으로 갔다. 그곳은 관광객들이 아니라 발리의 서민들이 노곤한 피로를 내려놓는 곳이다. 해가 지기 시작해 어둑해진 사이를 둘러보니 어느새 연인들이 해변을 가득 메웠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살아있는 날들의 축제였다.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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