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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동서고금 문학작품 속 가상세계 다뤄



실제로 가본 적도 아예 존재한 적도 없지만, 우리의 감각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가상 세계. 이곳으로 독자를 이끄는 것이 문학의 힘일 것이다.

이 책은 동서고금의 문학 작품 속 가상 세계를 다룬다. 부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상 세계로의 여행’에 주목하자. 기원전 1750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길가메기 서사시’부터 2015년에 나온 인도 작가 살만 루슈디의 ‘2년 8개월의 28일 야화’까지 약 4000년 동안 인류 역사와 함께한 문학 작품 속 상상의 세계를 탐험한다.

책은 100여개의 작품을 ‘고대의 신화와 전설’ ‘과학과 낭만주의’ ‘환상소설의 황금기’ ‘새로운 세계 질서’ ‘컴퓨터 세계’라는 다섯 가지 주제에 따라 나눠 연대순으로 배열한다. 언론인 겸 문학비평가 로라 밀러가 책임 편집을 맡고 40여명의 작가 및 전문가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작품 당 2쪽 정도를 할애하는 일종의 ‘문학 속 가상세계 백과사전’이다. 그림까지 풍부하게 곁들여져 처음부터 훑어가지 않고 필요한 부분을 골라서 읽는 재미가 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보자. 트로이 함락 이후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담은 이 작품에는 환상적인 생물과 신화적인 소재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리스 여행가들이 낯선 땅에서 가져온 실제 정보도 나온다. 예컨대 황금 양털을 찾으러 떠난 아르고호 선원들 얘기는 흑해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이 사금 채취에 양가죽을 이용한 사실을 버무린 것이라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컴퓨터 시대인 21세기에도 가상 세계는 문학을 지배하는 핵심 코드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해마다 거론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대표적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바닥없는 우물 속으로 뛰어드는 식의 이세계(異世界)를 창조해온 하루키 작품세계의 연장이라고 분석한다. 소설은 옴진리교 사건 이후 작가를 사로잡은 영적인 세계를 다룬다. 숲의 정령과 비슷한 ‘리틀 피플’의 존재는 주인공들이 뭔지 모를 운명론에 끌려가는 듯 보이게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게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이라고 필자는 설명한다.

신화와 전설의 시대에서 근대 혁명과 산업화 시대를 거쳐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에도 가상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고도 강력한 문학적 툴이다. 그것은 왜인지, 또 어떻게 그 쓰임새가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간단한 소논문의 집합 같은 책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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