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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호퍼의 그림들, 소설로 풀어내다

1932년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뉴욕의 방’.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이 그림을 모티브로 쓴 단편 ‘음악의 방’이 ‘빛 혹은 그림자’에 수록돼 있다.ⓒSheldon Museum of Art·문학동네 제공




이 책은 이렇게 읽는 게 좋겠다. 우선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맨 앞에 실린 그림을 본다. 미국 대표적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대표작들이다. 그는 ‘고독한 도시의 화가’란 별명을 가졌다. ‘밤을 새우는 사람들’ ‘호텔방’ ‘자동판매기 식당’ ‘바닷가 방’ ‘뉴욕의 방’….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공간에 무표정한 인물들이 모호한 정물처럼 놓여 있다. 그 속엔 마치 누군가 읽어주길 기다리는 이야기가 있는 듯하다. 이 책에는 각 그림에 영감을 받은 소설 17편이 수록돼 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 그림 속 상황을 상상해본다. 그런 뒤 읽어 가면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극적 반전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재능에 끊임없이 감탄할 수 있다.

먼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쓴 ‘음악의 방’. 그가 고른 그림은 ‘뉴욕의 방’이다. 이 책의 기획자이자 소설가인 로런스 블록이 킹에게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소설을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을 때 킹은 “제가 호퍼를 좋아하거든요”라고 했다. 그의 집에는 ‘뉴욕의 방’이 걸려있었다. 킹은 “그 그림이 저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죠”라고 했다. ‘뉴욕의 방’은 호퍼에게 어떤 말을 걸었을까. 킹은 그림이 그려진 1932년 미국 대공황기를 소설의 배경으로 택한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 신문 연재만화를 읽고 피아노 앞에 앉은 부인은 피아노 건반을 만지작거린다. 킹은 평온한 일상을 담은 듯한 그림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기발한 이야기꾼의 솜씨가 번쩍인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은 하나같이 걸출하다. 작가 명성에 따라 소설을 골라도 좋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창가의 여자’를 펼쳐본다. 오츠는 호퍼의 ‘오전 열한시’를 보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전 11시에 누군가를 기다린다. 발가벗고서. 그러나 신발은 신고.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로버트 올렌 버틀러는 피에로가 등장하는 그림 ‘푸른 저녁’에서 예상하기 힘든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유명 화가이자 작가인 조너선 샌틀로퍼는 호퍼의 그림 ‘밤의 창문’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시 그녀가 보인다. …깜빡이고, 덧없고, 미치게 만든다.” 그림이 주는 시각적 효과 때문에 이어지는 얘기가 더 궁금해진다.

호퍼의 ‘자동판매기 식당’에서 영감을 받아 쓴 블록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은 올해 에드거상을 수상했다. 블록은 작가들을 섭외할 때 ‘에드워드 호퍼’라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제시했다. 주제도 장르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책에는 어떤 책보다 다양한 내용과 장르의 소설이 수록됐다.

범죄 추리 스릴러 에로 같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책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고 작가들의 기발한 상상력에 자극받고 싶다면 한 편씩 아껴가며 읽게 될 게 분명하다.

블록은 소설집을 만들기 위해 호퍼의 그림 18점을 골랐지만 작품은 17편만 나왔다. 이야기를 찾지 못한 그림은 책의 표지화인 ‘케이프코드의 아침’이다. 그는 재미있는 제안을 안다. “독자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에게 18번째 그림을 맡기게 됐다.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풀어내라”고.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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