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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장 류재광 목포한국병원장 “숱한 환자 직면… 오직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류재광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장(인턴)은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참혹했던 시민들의 상태에 대해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재수사 요구가 뜨겁다.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증거들은 재수사 요구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지난달 24일 목포에서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장(인턴)으로 환자를 돌본 류재광) 목포한국병원장을 만났다. 그는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 1980년 5월 17일 상황은 어땠나.

5월 17일 자정 무렵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오더니 군인들이 몰려왔다고 했다. 나가보니 공수부대 1개 지대 병력 40여명이 모여 있었다. 10명씩 4줄로 선 그들은 착검상태였다.

- 공수부대가 병원에 온 이유에 대해 말하던가.

그들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곧 10명씩 줄지어 병원 계단을 올라 병원 곳곳으로 이들은 흩어졌다. 새벽 6∼7시경 학생 환자들이 밀려왔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공수부대가 투입돼 학생들을 곤봉으로 두드려 팼다는 것이었다. 18일 신경외과는 뇌출혈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 20일 상황은 어땠나.

20일 상황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자, 시민들은 공수부대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부대라 우린 모른다”고 발뺌했다. 그날 저녁 병원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시민들은 횃불을 들고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 공수부대는 21일 시민에게 발포했다.

병원으로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M16 소총에 맞은 시신들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다리에 총을 맞은 환자는 다리가 끊어졌고, 이마에 총을 맞은 시신의 경우, 머리가 전부 날아가고 턱만 남아있었다. 이런 참혹한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힐 여력조차 없었다.

- 응급실 상황은 어땠나.

이송된 환자는 병원 바닥에 눕히곤 했다. 비교적 상처가 가벼운 환자들은 병원 1층 본관과 원무과, 그리고 대기실과 복도에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눕혔다. 총상환자는 출혈이 심하니까 혈관 노출술을 통해 수혈을 해야 했다. 한참 시술을 하다 돌아보면 환자의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 군이 철수하면서도 사망자가 많았다고 들었다.

계엄군은 철수를 하면서 2층 이상의 건물이 나오면 선탑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 트럭 뒤에 탄 군인들도 일제히 건물을 향해 사격을 했다. 이때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죽었다.

- 많은 시신 보면서 패닉 상태에 빠지진 않았는가.

총을 맞고 실려 온 환자들을 보면서 당시 난 정신없이 살려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틈이 없었다. 훗날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을 검시하면서 불과 20일 남짓한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시신과 피를 목격했다.

- 22일 이후 병원 상황은 어땠나.

26일 ‘독침사건’이 있었다. 그날 오전 10시경 젊은 남자 한 명이 ‘나 독침 맞았소’라고 악을 썼다. 그러나 발진은 없었다. 곧 어머니란 사람이 울면서 병원에 따라 들어왔다는 점이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일전에 간 적이 있는 막걸리집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광주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라고 했었다. 독침에 맞았다는 아들은 전남도청 시민군의 정보부장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러나 곧바로 사라져버리고 이후 시민군에 북한군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글·사진=김양균 쿠키뉴스 기자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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