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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단 하루도 지나칠 수 없는 소비, 그 유혹

원조 화장품 방문판매 회사인 미국 ‘에이본’사의 화장품 판매원 ‘에이본 레이디’의 모습. 우아한 레드컬러 정장에 모자를 쓴 에이본 레이디는 주부들에게 화장품뿐만 아니라 ‘멋진 친구의 방문’이라는 즐거움도 선사했다. 휴머니스트 제공




아무것도 사지 않고 하루를 지낼 수 있을까.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소비하는 인간)’라고 불리는 현대인이 하루라도 소비하지 않긴 쉽지 않을 것이다. 서양사학자인 저자 설혜심은 실생활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학술적 관심은 별로 받지 못했던 ‘소비’에 눈을 돌렸다. “소비라는 인간 행위의 동기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사회적 효과를 살핀다.”

‘소비의 역사’ 서문이다. 그는 근대 산업사회와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한 소비를 욕망 유혹 저항 등의 관점에서 파헤친다.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아내 앤 해서웨이에게 준다.”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유언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언장과 유언검인목록에서 당시 사람들이 소유한 물건을 찾고 소비 행태를 유추한다. 사례 중심으로 전개되다보니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이런 방식으로 신분 상승의 욕망을 담은 양복, 미지의 세계를 상징하는 중국산 도자기, 백색이 우월하다는 신화를 퍼뜨린 하얀 비누 등을 다룬다.

소비는 유혹이 있기에 가능하다. ‘우아한 한복차림의 여인이 재봉틀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탕건을 쓴 남성이 일을 도울 태세로 서 있다.’ 1892년 미국 재봉틀 제조사 ‘싱어’가 조선 여인들에게 재봉틀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카드의 그림이다. 싱어는 이런 이미지로 세계 각국의 여인을 유혹했고 할부제를 최초로 도입, 전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방문판매와 계모임 등의 현대적 기원도 찾아볼 수 있다. 출판사 외판원 출신인 홀 맥코넬(1858∼1937)은 화장품 회사 ‘에이본(Avon)’을 세운 뒤 ‘에이본 레이디’를 내세워 방문판매에 성공했다. 주부들의 말벗이 된 에이본 레이디는 원조 ‘화장품 아줌마’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계(契)를 동양문화라고 여기지만 실은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금융네크워크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 노동자들은 양복 계나 신사화 계를 했다. 보통 20명이 1실링씩 21주 동안 돈을 모았고 매주 추첨으로 곗돈을 탔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70년대 주부들 사이에 반지 계가 한 때 크게 유행했다.

소비가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거나 저항의 수단이 된 역사도 있다. “설탕 1파운드를 소비할 때마다 사람의 살 2온스를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8세기 말 영국의 사회평론가 윌리엄 폭스가 한 말이다. 설탕 거부 운동의 메시지였다.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설탕 불매로 노예제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윤리적 소비의 시원이다.

1950∼60년대 흑인은 백인의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 전략에 반기를 들며 저항했다. 분리평등이란 백인들과 분리된 공간에서만 흑인들이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제한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백인은 흑인을 위한 화장실을 별도로 만들고 음수대도 따로 사용하도록 했다. 버스나 열차에 흑인용 좌석이 지정됐다. 차별은 죽어서도 이어져 흑인은 백인이 묻히는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흑인들은 백인 소유 상점에 대해 불매운동을 펼쳤다. 그들이 든 슬로건은 “차별을 사지 맙시다(Don’t Buy Segregation)”였다.

이 책은 소비의 기원을 탐색하는 역사학에서 출발해 소비의 욕망을 분석하는 심리학을 거쳐 소비의 저항성을 지향하는 정치학으로 마무리된다. 챕터마다 다양한 컬러 사진과 그림 이미지가 수록돼 보는 즐거움도 크다. 구미 사례 중심이란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만큼 생생하고 재미있게 소비의 역사를 풀어쓴 책을 찾긴 어려워 보인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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