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공주…” 숨죽여 살던 ‘기지촌’ 할머니들이 일어섰다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의 지난해 10월 초연 무대에서 김숙자 할머니가 미군 병사 영철(유명상 분)에게서 꽃반지를 받고 있다. 햇살사회복지회 제공


“오늘이 너 한국 생일이야. 한국 미역국 먹어봤니?”

박은희(가명·69) 할머니는 아들 역할을 맡은 배우 조시현(36)씨의 팔을 연신 쓸었다. 30여년 전 미국으로 입양 보낸 아들이 꿈속에 찾아오는 장면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근데 엄마, 저 왜 입양 보냈어요?”라는 조씨 말에 박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골랐다. 박 할머니가 “그때는 시대가…한국에서 자랐어도 ‘튀기’라고 흉보고”라고 말을 잇자 조씨는 가만히 박 할머니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누였다. 이어 박 할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들려줬다는 자장가 ‘매기의 추억’을 부르기 시작했다.

최근 찾은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팽성예술창작공간에서는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주인공은 미군 기지촌에서 살았던 할머니들이 맡았다. 기지촌 여성으로서 겪은 이야기가 모이자 극 한 편이 탄생했다. 지난해 평택 한 교회에서 초연을 했던 할머니들은 뜨거운 반응 덕에 다음 달 서울에서 한번 더 무대에 서게 된다.

기억에 뿌리를 둔 대사는 연습 때마다 조금씩 바뀌었다. 꿈속에서 만난 아들에게 미역국 한 대접을 내밀며 “이게 시위드(seaweed)야, 시위드” 했던 박 할머니의 대사는 다음 연습에서 “코리안 미역국이라는 거야”로 바뀌었다. 함께 연습하는 다른 할머니들은 박 할머니가 꿈속에서 아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숨죽이고 눈물을 글썽였다가도 ‘코리안 미역국’이라는 말에는 소녀처럼 킥킥 웃었다.

안정리는 한국전쟁 후 미군부대가 주둔하며 형성됐던 기지촌이다. 전쟁 후 빈곤에 시달리던 여성들이 주로 이곳에 유입됐다. 당시 정부 관리하에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기지촌 여성들은 ‘양공주’라는 비난에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들이 연극으로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한 건 5년 전쯤이다. 기지촌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김숙자(72) 할머니는 2012년 7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극 ‘숙자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다. 당시 연극을 마친 김 할머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우리 삶이 남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미군 ‘위안부’가 존재했으며 여기에 국가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올 초에야 인정받았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월 기지촌 여성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57명에게 각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기지촌 여성들이 “정부가 기지촌을 불법행위 단속 예외지역으로 지정해 성매매를 단속하지 않았고 성병 관리를 위해 강제 수용까지 했다”며 위자료 10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낸 소송의 판결이었다.

법원은 성병 감염자 격리 규정이 마련된 1977년 8월 전에 격리 수용된 57명에게 신체적·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손해배상 청구 소멸시효인 5년이 지났다며 책임을 부인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과 같이 국가 권력기관의 국민에 대한 불법 수용 등 가혹행위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위법행위”라며 “소멸시효로 피해 회복의 길을 봉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이유를 밝혔다. 할머니들과 법률대리인단은 일부승소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할머니들과 함께 뮤지컬을 준비 중인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원장은 “숨어 살다 무대 위에서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표현하게 된 할머니들께 박수를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 할머니 5명과 전문배우들이 꾸민 뮤지컬 ‘그대 있는 곳까지’는 다음 달 12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공연된다.

평택=임주언 기자 eo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