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환각, 예술이 되다

쿠사마 야요이, ‘All the Eternal Love…’. London Victoria Miro gallery


어두운 거울 방에서 노란 호박들이 빛을 뿜어낸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호박은 사방이 모두 거울인 공간에서 끝없이 증식 중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호박에 촘촘히 박힌 검은 점까지 가세해 환각을 부채질하는 ‘매직 룸’은 일본의 여성 작가 쿠사마 야요이(88)의 작품이다. 이 공간에 들어선 관람객은 작가의 마법에 빠져 나올 생각을 않는다. 올 봄 미국 워싱턴DC 허시혼 미술관에서는 밀려드는 인파에 작품이 크게 손상되기도 했다.

쿠사마에게 호박은 각별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학대를 피해 마음을 준 것도, 끈질기게 관찰하고 그려 유명세를 얻게 한 것도 호박이다. 그의 호박 조각은 일본의 예술섬 나오시마를 비롯해 지구촌 곳곳에 설치됐다. “호박은 애교가 있고, 야성적이다. 나는 호박 때문에 삶을 살아냈다”는 작가에게 둥글넓적 푸근한 호박은 ‘얼터 에고’(또 다른 자아)였던 것이다.

쿠사마는 반복되는 도트 무늬와 그물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현기증이 나도록 점과 그물이 무한증식하는 특이한 그림은 정신병력에서 기인한다. 어린 시절 심약한 아버지와 극악스러운 어머니를 피해 골방에 숨었던 그는 열살 무렵부터 주위가 붉은 점으로 뒤덮여 보이는 환각이 시작돼 평생 시달렸다.

절망을 딛고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 작가가 됐다는 점에서 인간승리이자 예술승리가 아닐 수 없다. 오는 10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도쿄 신주쿠에 문을 연다. 그곳에도 마법의 방, 무한의 방을 여럿 만든다.

이영란(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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