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나와는 다른 이를 위해 음악이 연주되는 사회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 한 장면(왼쪽 사진). 영화는 자폐아인 피아노 신동이 피아노를 배우며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영국의 클래식 페스티벌 ‘BBC 프롬스’ 무대. 올해 처음 자폐아를 위한 콘서트가 따로 마련됐다. 싸이더스·필자 제공


지난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 도중 한 자폐 아동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 조용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에 몰입하던 객석의 청중도, 무대 위의 연주자도 모두 잠시 동요했다. 아이의 보호자들은 아이의 입을 막고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급히 객석에서 퇴장했다.

이후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블로그에서는 이 콘서트들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다. 물론 공연 그 자체보다 지적 장애인들의 공연장 출입에 대한 논쟁이었다. 특히 자폐증상이 있는 자녀를 공연장에 데리고 온 부모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반면 지적장애인들도 문화예술 생활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며 그들의 출입을 반대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반론도 소수지만 발견할 수 있었다.

윤리적으로 어느 쪽 의견이 정당한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클래식 공연장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이다. 타인의 감상과 연주자를 방해하지 않고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청중에게 애처로울 만큼 수동적인 매너와 침묵을 강요하는 곳이 바로 콘서트홀이다.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음악에다 정적인 침묵의 무게가 가득한 분위기는 자폐적 성향을 가진 아이가 버티기 어려운 공간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도 자녀를 데리고 공연장을 찾아온 부모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음악을 통한 치유의 기적을 바랐을 것이다. 여러 공연장에서 지적 장애아동의 공연 관람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실제로 심각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아동에 대한 음악 치료가 긍정적 효과를 나타낸다는 연구결과는 오랫동안 꾸준히 보고돼 왔다. 하지만 이 효과는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소통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고, 함께 따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던 아이들을 소통의 세상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불가능한 공연에 부모가 아이를 데려온 이유는 그들을 위한 특수한 공연 자체가 매우 드물고, 있다 하더라도 정보를 쉽게 얻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 여름 영국 최대 클래식 콘서트 페스티벌인 BBC 프롬스는 123년 역사상 최초로 자폐아를 위한 콘서트를 따로 마련했다. 웨일즈 국립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한 이 공연은 자폐아는 물론 지적 장애를 가진 성인, 시각 및 청각 장애인까지 청중으로 아우르는 큰 이벤트였다. 공연장을 처음 찾는 장애인들을 위한 가이드 영상도 일찌감치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수시로 제공됐다. 무대 위에는 악단 이외에 두 개의 커다란 스크린을 걸어놓고 다양한 지시어와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며 쉽게 산만해지는 특수한 청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휘자와 연주자들 또한 수시로 객석에 말을 걸고 호응을 이끌어내며 소통을 유쾌하게 이어갔다. 영국을 대표하는 음악 축제와 국영방송, 그리고 심각한 음악만 연주할 줄 알던 권위 있는 악단이 함께 공모한 이 파격적 시도는 단순한 음악 치료 서비스를 넘어 나와 다른 조건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배려와 인정, 그리고 관용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는 나와 다른 육체적, 정신적 조건을 가진 구성원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는가. 2017년 현재 국내 자폐증 환자는 4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콘서트홀에서 들린 아이의 비명소리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지 못한, 4만명의 나와 다른 구성원이 보내는 긴급구조신호(SOS)와 같다. 어쩌면 무대 위의 음악보다도 우리가 더 귀 기울이고, 안타까워하고, 공감해야 할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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