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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BB크림에 꽂힌 북한 여성들

‘조선자본주의공화국’은 북한 내부의 변화를 세세하게 담아낸 신간이다. 사진은 평양 도심에 있는 개선청년공원에서 포즈를 취한 북한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 평양에서는 장화가 인기 있는 패션 아이템이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장화를 신은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비아북 제공




우리는 저 멀리 휴전선 너머에 사는 북한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허구한 날 뉴스에는 북한의 핵 위협이나 미사일 도발에 관한 이야기가 차고 넘치지만 북한 주민의 ‘일상’을 다룬 보도는 접하기 힘들다. 북한 주민을 취재하는 게 쉽지 않은 데다, 이런 내용은 엄중한 ‘도발 이슈’에 비하면 뉴스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자본주의공화국’은 베일에 가려진 북한 주민의 삶을 전하는 신간이다. 지은이는 이코노미스트와 로이터통신에서 각각 한국 특파원을 지낸 다니엘 튜더와 제임스 피어슨. 두 사람은 첫머리에 “3명 이상의 신뢰할 만한 취재원을 통해 확인되는 주장”만을 실었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을 현대 북한의 생생한 실제 이야기, 그곳에 사는 2500만 주민의 삶의 극적인 변화상에 대한 정보가 담긴 입문서로 봐주었으면 합니다.”

북한 주민의 삶이 크게 달라진 건 1990년대부터다. 94∼98년 북한을 덮친 대기근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에만 적게는 20만명, 많게는 300만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대기근을 전후해 생긴 변화상이 자세하게 실렸는데 핵심은 이렇다. “대기근 이후 북한에서 경제를 지배하는 규칙은 단 하나다. 규칙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 경제는 사실상 이중 경제의 성격을 띠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는 ‘공식적인’ 시스템에 따라 국가가 정한 일터에서 밥벌이를 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장마당’으로 통하는 시장에 물건을 내다팔아 가족을 건사했다. 장마당에 들고나는 품목은 한두 개가 아니다. “장마당에서는 고양이뿔만 아니면 다 구할 수 있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니까.

쉽게 말하면 대기근 이후 북한에도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트 집안과 연결돼 있지 않은 데도” 자산이 1000만 달러가 넘는 신흥 자본가들이 생겨났고, 최근 평양 카페에는 피자를 주문하면서 아이패드로 뭔가를 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북한 권력의 얼개를 심도 있게 해부한 내용도 비중 있게 실렸지만 역시 눈길을 끄는 건 북한 주민들의 달라진 생활상이다. 가령 패션을 다룬 챕터를 보자. 함경북도 청진은 현재 북한의 ‘패션 수도’로 거듭났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아내 리설주는 북한의 트렌드 세터로 유명한데, 유행에 민감한 청진 사람들은 리설주를 “좀 촌스럽다”고 평가한다.

북한 여성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가 많은 화장품은 BB크림이다. 젊은이들은 MP3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는데, 여기엔 북한의 노래는 별로 담겨 있지 않다. 남한의 가요가 인기다.

알려졌다시피 한국 드라마나 미국의 영화도 즐겨 본다. 그런데 과거처럼 DVD보다는 암암리에 돌고 도는 USB를 활용하는 편이다. USB는 DVD에 비해 복제나 배포에 용이하고 내용물을 금방 삭제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저자들은 USB가 지닌 가능성에 주목한다.

“USB는 북한이라는 정권의 정보 통제력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한 나라에서 USB를 통한 데이터 저장 방식은 인터넷의 대용품 역할을 한다. 컴퓨터가 점점 더 많은 북한 가정으로 유입되면 이에 따라 국가의 통제를 붕괴시킬 잠재력도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두 저자가 내다보는 북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들은 북한 사회의 변화가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에는 회의적이다. “우리는 단기 혹은 중기적으로 볼 때 북한에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시나리오는 현 정권 지배 하에서의 점진적인 국가 개방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10∼20년 후 북한이 어떤 모습일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때까지 우리는 당혹감과 희망이 뒤섞인 심정으로 계속 지켜볼 따름이다.”

북한의 도발이 끊이지 않는 요즘에는 통일이 난망한 과제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북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될 것이다. 대화와 소통은 언제나 상대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는 법이니까.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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