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미완의 8·15, 값싼 승리주의 경계를



‘김상헌은 사공의 목덜미며 몸매를 찬찬히 살폈다. 야위고 가는 목에 힘줄과 핏줄들이 얼기설기 드러나 있었다. 힘줄은 힘들어 보였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중에서)

1636년 겨울 청 태종이 이끌고 온 20만 군병에 쫓겨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간 인조를 하루 늦게 뒤따르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송파나루 사공을 칼로 내리치는 대목이다. 얼어붙은 강 위로 길을 잡아 임금의 가마를 인도했고 또 자신에게도 길을 안내했던 그 사공이다. 청병이 쫓아오면 같은 길을 또 잡아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한다는 사공은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남한산성’은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지 10년도 채 못 돼 또 들이닥친 병자호란을 다룬다. 무능한 임금,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명리싸움에만 급급한 신하들의 모습을 답답할 만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이 아팠다. 변란 속에서도 힘든 삶을 이어가는 백성들 얘기가 없었다면 정말 읽어내기 어려웠을 터다.

영화 ‘군함도’를 보며 내내 ‘남한산성’을 떠올렸다. 300여년을 건너뛰어 또 벌어지는 민초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화는 ‘지옥섬’으로 더 잘 알려진 해저탄광 하시마(군함도는 별칭)에 끌려와 노예노동을 강요당하며 차별받는 식민지 백성들의 삶을 리얼하게 고발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영화는 처참하게 짓눌리고 유린당한 한국인 징용자들이 들고일어나 군함도를 경영하던 미쓰비시와 경계병들을 향해 무력투쟁을 일으키는 쪽으로 몰아간다.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총격전 끝에 마침내 군함도 탈출에 성공한다. 물론 그건 픽션이다. 군함도에서 한국인 징용자들은 쟁의조차 일으키지 못했다(‘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김민철·김승은 외, 2017).

징용자들의 고통과 울분에 대한 공감이 오죽 컸으면 그리했을까. 하지만 영화적 상상력이 지나치게 발동되면서 ‘군함도’는 값싼 승리주의를 노래하는 한낱 오락영화로 변질되고 말았다. 아무리 상업영화라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기왕 고통스러운 역사를 끄집어내 영화로 만들 것이라면 인류 보편적 가치가 공감될 수 있는 개연성을 갖춰야 했다.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한·일 양국은 아직 과거사 문제에서 후련한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 근본적으론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식으로 일관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 만연된 값싼 승리주의 탓도 무시하기 어렵다. 우리가 옳다며 ‘대한민국 만만세’만을 외쳐서는 상대의 마음을 살 수 없다.

식민지지배·피지배의 관계는 인권의 문제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벌어지는 내용은 현재로 이어진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그렇고 징용자들의 한이 여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일협정은 사실상 경제협력협정에 더 가까웠던 탓에 인권과 같은 가치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재협상 또한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가치의 문제는 상대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공유, 즉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감이 구축·확산될 때 비로소 해결 가능성을 갖는다. 그 공감의 시작은 우리로부터라야 한다. 일본에 대해, 아니 세계를 향해 한국인 징용자, 위안부, 사할린 잔류자, 원폭 피해자 등의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 내용을 인식하며 공감하고 있나.

‘군함도’는 분명 징용자 문제에 대한 공감을 앞세웠다. 다만 스토리가 값싼 승리주의로 튀면서 역사적 비극을 마음 깊이 새기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본다. 하물며 상대를 향한 공감요청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남한산성’이 고통스러운 답답함으로 독자들의 인식을 환기(喚起)시켰다면 ‘군함도’는 그저 픽션으로 내려앉았을 뿐이다.

아픔은 기억으로 새겨야 의미가 있다. 고통과 비극을 픽션으로 분칠하기 시작하면 역사는 의미를 잃는다. 8·15 광복도 미완이다. 재외 각국에서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활약했지만 광복은 우리 손으로 쟁취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일본의 패전으로 주어졌다. 그조차 남북으로 갈린 채 70여년이나 불완전한 모습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값싼 승리에 취해 있을 겨를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이 아파하고 더 깊이 기억해야 한다. 비극의 역사를 잊으면 우리의 현실은 그저 값싼 승리로, 싸구려 은혜로 전락할 뿐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다지고 기억하지 못한 채 얻은 은혜는 필시 가짜일 터다. 송파나루 사공의 비극을 새기고 군함도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내일은 광복 72주년이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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