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금미의 시네마 패스워드] 부패한 이 나라 떠날 것인가, 바꿀 것인가… 낯설지 않은 질문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크리스티안 문쥬의 ‘엘리자의 내일’의 한 장면. 영화는 딸을 미래가 안 보이는 사회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다. 영화사 진진 제공


며칠 전 대기업 임원에게 언론사 간부, 전 검찰총장 등이 보낸 은밀한 문자메시지가 공개됐다. 아들의 채용을 위해 ‘하해와 같은 은혜를 앙망’하는 문구, 사위의 해외발령을 청탁하는 글들에 담긴 추하고 적나라한 욕망은 읽는 이조차 낯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침 지난 10일 개봉한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신작 ‘엘리자의 내일’은 청탁과 부정이 만연한 루마니아의 현실을 우리 사회의 닮은꼴처럼 비추고 있어 흥미롭다. 지난해 칸영화제 최우수감독상 수상작으로, 원제는 대학수능시험을 뜻하는 ‘바칼로레아’다.

우등생인 엘리자가 시험 전날 등굣길에 난데없이 ‘묻지마 폭행’을 당해 오른팔을 다친다. 의사인 아버지 로메오는 하나뿐인 딸이 루마니아를 벗어나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영국에 유학 보내는 일에 집착한다. 희망하던 영국 대학에서는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상태지만 바칼로레아에서 요구되는 성적을 충족시켜야 하기에 시험을 제대로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애가 탄다.

작은 소도시에서 중산층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로메오에게도 루마니아는 희망 없는 불안한 사회일 뿐이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사회. 환멸에 가득 찬 얼굴로 엘리자를 반드시 ‘선진국’에 보내겠다고 고집하는 그에게 노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렇게 다들 떠나면 뭐가 달라지겠니? 여기 남아서 변화시켜야지.”

그러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협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운 법. 미래가 없는 부패한 사회에서 떠나기 위해 결국 그 비리의 일부가 되기로 한다. 거물급 인사에게 청탁해 답안지 조작에 도움을 받기로 한 것. 엘리자에게 이런 부정행위에 동참하게 만드는 그의 결정에 아내는 반발하며 이렇게 말한다. “한번 양심을 버리면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회색은 검어질 뿐 다시 희어지지 않는다 했던가. 부정한 방법으로 이룬 성공은 그것이 아무리 빛나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끝내 양심의 가책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지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로메오의 말처럼 ‘인생에선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믿음이 지배하는 사회, ‘원칙을 지키면 손해’인 사회에서 깨끗한 양심이라는 기회비용은 쉽게 무시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바칼로레아가 치러지는 이틀을 전후로 한 며칠간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풀어나간다. 긴 호흡으로 등장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유려한 롱테이크 또한 그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부각시키며 선택과 결정에 대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짧은 시간 동안 특별한 사건 없이 어떤 선택의 상황에 놓인 인물의 갈등만으로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 중 200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떠올리게 한다.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인 1980년대를 배경으로 불법 임신중절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주제를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오늘날 루마니아 중산층의 초상을 담담히 그려냈다. 아니, 먼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회자된 ‘헬조선 탈출’, 대학입시와 교육, 부모 자녀 간 갈등, 청탁과 짬짜미 등을 대입하면 이것은 우리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금미 <영화 칼럼니스트·영화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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