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신창호] ‘구부러진 것’을 사랑할 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있다’와 ‘없다’에 대해 아주 심오한 철학을 펼쳤다. 있다는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없다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 주장이다. 절대적인 ‘유(有)’와 절대적인 ‘무(無)’, 그리고 이 둘의 대립 외에는 아무것도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생명은 ‘진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선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고 해도 완전하지도 않다. 성장하면서도 죽어가고, 멀쩡하면서도 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존재’의 눈으로 보면 사람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없다.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랄 뿐이다.

우리말의 ‘장애인’은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란 뜻이다. 영어로도 장애인은 ‘The Disabled’로, 같은 의미다. 말뜻 그대로를 적용하면 모든 사람이 다 장애인인 셈이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으며 정신지체를 앓는 사람을 자신과 같은 ‘종류’로 보지 않는다. 자기네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아예 별종으로 여기고, 모든 일을 신체가 멀쩡한 사람을 기준으로 행한다. 눈이 보이지 않아 글을 읽을 수 없고, 귀가 들리지 않거나 지적장애 때문에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세상을 살아갈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도태자’ ‘낙오자’의 낙인을 찍는다.

장애인 인구가 지난해 말 기준으로 251만명을 넘어섰다. 지체·시각·청각·지적·뇌병변·자폐 등 각종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5%에 육박하는데도 편견과 차별로 가득 찬 우리 사회의 시각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외형적으로 보면 장애인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은 2000년대 들어 상당 부분 개선됐다고 할 수 있다. 공공기관과 다중이용 대형 건물의 장애인 편의시설은 꽤나 잘 갖춰져 있다. 길거리 보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도블록이 건널목마다 설치돼 있다. 지하철마다 지체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엘리베이터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설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우리들의 의식(意識)이다.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함께 삶을 고민해주지 않는 우리들의 생각이 문제란 말이다.

그저 ‘우리보다 모자라니 배려하면 전부’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으로는 영원히 장애인은 ‘이방인’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장애인이 ‘나’와 똑같은 가슴으로 희망을 꿈꾸며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대접받을 때 비로소 편견과 차별은 사라질 수 있다.

지난 11일자 국민일보 미션면에는 ‘장애인과 함께하는 설교’가 실렸다. 목회자의 설교를 사회적기업 ‘샤프에스이’ 소속 지적장애인 근로자 4명이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교정해 올린 것이다. 일반인이 구사하는 한자어를 쉬운 한글로 바꾸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인 상황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장애인의 시각에서 신문 지면을 만드는 것은 초유의 일이다.

첫 설교 원고를 보내준 ‘지체장애인선교협의회’ 회장 이계윤 목사는 “성경 말씀의 취지를 저보다 훨씬 잘 전달했다”고 감탄했다. 인천공항 대형 항공기 정비 등 각종 항공기 서비스 제공 업체인 샤프에스이는 배려 차원에서만 장애인을 고용하는 기업이 아니다. 장애인 근로자들의 관점으로 기업문화를 바꾸겠다는 계획을 가진 곳이다.

이성복 시인은 ‘다만 때아닌 때늦은 사랑에 관하여’라는 시를 통해 ‘이제는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똑바로 생긴 것’이 아니라 ‘구부러진 것’을 사랑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구부러진 존재라는 자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눈 아래에선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장애를 가진 사람도 다 구부러진 존재이고, 서로 사랑해야만 구부러진 데가 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신창호 종교기획부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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