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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과의 전쟁”… 문단·영화계로 번지다

서울 서초구 서울변호사회관에서 8일 오전 열린 ‘김기덕 감독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영화·여성·법조계 인사들이 ‘영화인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 감독은 여배우에게 손찌검을 하고 베드신 촬영을 강요한 혐의로 피소됐다. 뉴시스


시인 A씨는 2015년 한 문예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시 한 편을 썼다. 원고료가 입금되기 전 해당 문예지의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현재 우리 문예지를 정기구독하고 있지 않은데 원고료를 정기구독권으로 대체하겠느냐”고 물었다. A씨는 망설였지만 고작 7만원인 원고료를 고집하다 평판이 나빠질까 우려해 “그러겠다”고 했다. A씨는 “원고료는 작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지만 혹여 담당자들 눈 밖에 날까봐 당시에는 강하게 요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작가와 배우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목소리를 내기 힘든 경우가 많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이나 영화계의 김기덕 감독 폭행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다. 문화예술계 특성상 갑질 행위의 위법성, 불법성을 명확하게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배우와 감독,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 등 문화예술계의 견고한 권력구조에 가려진 법적 사각지대의 ‘을’들을 돕기 위해 법조계가 나섰다.

불법인지 아닌지…

서울변호사협회는 최근 인권침해대응소위원회 내에 ‘문단 내 생활적폐 청산 및 관련법 개정 태스크포스’를 설치했다. 을의 위치에 있는 작가들을 돕는 조직이다.

TF는 문단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고질적 병폐를 4가지로 정리했다. 원고료 미지급, 그릇된 출판계약 관행, 열악한 저작권 인식, 성폭력 등의 인권침해다. 출판계약 시 작가가 계약 조건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A씨의 경우처럼 원고료를 정기구독료로 대체하는 등 불공정 행위는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이미 발표된 작품을 잡지나 신문에 다시 실을 때도 재수록료를 지급하지 않는 등 저작권이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다. 성폭력 등 인권침해는 문단 내 성폭력 사건으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이처럼 불합리한 대우에도 작가들은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 어렵다. 유일한 등단 통로로 여겨지는 문예지와 책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출판사가 작가들의 생존권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TF는 추가 피해 사례를 수집하고 대형 출판사와 문예지 측 의견도 들을 계획이다. 예술인 복지법 개정도 추진한다. 해당 법은 문화예술인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위반행위 적발 시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데 그쳐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 출범

서울변회에서는 8일 문화예술계의 다른 이슈에 대한 기자회견도 열렸다. 최근 ‘김기덕 사건’으로 촉발된 영화계 갑질 문제다. 지난달 26일 여배우 B씨는 과거 영화촬영 도중 김 감독으로부터 뺨을 맞고 성행위 촬영을 강요당했다며 검찰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법조계·여성계·영화계의 149개 단체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문화예술계에 만연해 있는 인권침해 문제 등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성희롱을 포함한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은 법률적 죄명도 없어 사건화를 하기도 어렵다”며 “갑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고 법이나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명숙 변호사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문화예술계에 만연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인권침해를 개선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공대위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공대위는 다음 달 7일까지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 성폭력 등 인권침해 신고전화’를 개설해 관련 피해 사례를 접수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등이 법률 지원을 돕는다. 여성영화인모임은 지난달부터 약 한 달간 영화계 종사자 500여명을 상대로 설문 등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공대위는 오는 9월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를 바탕으로 범영화계 인권문제 대책기구 마련, 실태조사 정례화 등을 논의할 방침이다.

[정정보도문] 영화감독 김기덕 미투 사건 관련 보도를 바로잡습니다

해당 정정보도는 영화 ‘뫼비우스’에서 하차한 여배우 A씨 측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본지는 2017년 8월 3일 <‘폭행·베드신 논란’ 김기덕 감독 “사실성 높이려다 생긴 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 것을 비롯하여, 약 24회에 걸쳐 영화 ‘뫼비우스에 출연하였으나 중도에 하차한 여배우가 김기덕 감독으로부터 베드신 촬영을 강요당하였다는 내용으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하였다고 보도하고, 위 여배우가 김기덕으로부터 강간 피해를 입었다는 취지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뫼비우스 영화에 출연하였다가 중도에 하차한 여배우는 ‘김기덕이 시나리오와 관계없이 배우 조재현의 신체 일부를 잡도록 강요하고 뺨을 3회 때렸다는 등’의 이유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하였을 뿐, 베드신 촬영을 강요하였다는 이유로 고소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 여배우는 김기덕으로부터 강간 피해를 입은 사실이 전혀 없으며 김기덕으로부터 강간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한 피해자는 제3자이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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