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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강주화] 박상륭 선생에 대한 기억



얼마 전 별세한 박상륭(1940∼2017)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소설가 이문구(1941∼2003)가 떠났을 때다. 그는 이문구 평생의 문우(文友)였다. 박 선생은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 등으로 독보적인 관념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던 작가다. 소설가 유용주는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온다면 1번은 박상륭”이라고 했다.

빈소 앞 나무 벤치에서 박 선생과 이야길 나눴다. 수습기자 시절이었으니 아마 나는 그에게 고인과의 관계나 그를 잃은 소회를 물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한 질문이나 답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내게 물은 것이나 남긴 말들은 잘 잊히지 않는다.

“자네 요즘 관심이 뭔가?” 박 선생이 세상모르는 20대 사회 초년생에게 한 첫 질문이었다. 저음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 강단 있었다. 환갑을 넘긴 어른이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 보이는 진지한 관심에 나는 약간 당황했던 것 같다. 한참 머뭇거리던 내게 그는 경어체로 말을 이어갔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각자의 괄호를 채우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난해한 그의 소설처럼 간단치 않은 조언이었다. 그때 수습기자의 패기로 당신은 그 괄호를 채웠냐고 물었나보다. “나는 그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선생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이었다. 이어 그는 “사랑을 많이 하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야기를 제법 길게 했다.

며칠 전 책장을 뒤져 그때 쓴 일기장을 열어봤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인생에서 단 3시간만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은 설지 않는다.” 짧은 순간이라도 사랑을 해본 이는 사람됨이 설익지 않고 깊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인간 본성의 심연에 닿아 있고 여기에 닿아본 사람만이 진정한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시인 강정은 최근 박 선생의 죽음 앞에 “이제는 너 자신의 허물과 오욕을 되새김질하고 스스로 나사못을 죄며 너만의 죽음을 연구하고 완수하라”는 숙제를 남겼다고 송사했다. 극작가 최창근은 “글이 곧 사람임을 가르쳐주신 큰 어른”이라고 헌사했다. 박 선생을 떠올리면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지 자문하게 된다. 아직도 답은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내게 남긴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해두기로 한다. “인생을 알고 싶다면 단 3시간만이라도 사랑을 해보라”고.

글=강주화 차장,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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