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음악, 권력의 의도에 따라 화해와 혐오를 오가다


 
음악이 가진 폭력적 힘을 강조한 에세이 ‘음악 혐오’의 저자 파스칼 키냐르. 프란츠 제공


1990년대 초 잔잔한 흥행을 일으킨 ‘세상의 모든 아침’이란 영화가 있었다. 신선처럼 자연에 묻혀 음악에 헌신하는 음악 거장 생트 콜롱보와 세속에서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제자 마랭 마레 사이의 갈등이 경이로운 음악을 통해 화해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는 많은 이들을 음악 애호의 길로 이끌었다. 실존인물들을 다룬 이 영화의 원작소설의 저자는 파스칼 키냐르라는 인물로 대대로 음악가 집안의 자손이다. 본인도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첼리스트, 오페라 작곡가라는 다양한 경력을 지녔으며 동시에 탁월한 언어 감각도 타고나서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영화와 소설의 성공과 음악 애호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센터 원장직을 역임하며 음악계와 문학계 양쪽 모두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94년 돌연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침묵 속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 뒤, 정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의 편린으로 완성된 에세이집이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음악 혐오’이다.

세상 온갖 갈등을 하나로 녹여낼 것 같던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의 음악의 숭고한 화해와 조정능력은 ‘음악 혐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음악이 가진 폭력적 힘과 무방비한 인간의 유약함만이 강조된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 요순시대, 그리고 제2차 대전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음악의 근원을 광범위하게 포착한 이 저서는 악기의 기원인 현악기 ‘리라’가 활시위 소리에서 유래했음을 기억하며 음악의 힘을 화살에 비유한다. 즉, 멀리서 들려오는 감동의 활시위 소리는 ‘멀리서 오는 죽음’이다. 눈꺼풀이 달린 눈은 보이는 것을 차단할 수 있지만 ‘눈꺼풀이 없는 귀’는 들려오는 소리를 차단할 방법이 없다.

키냐르를 긴 침묵으로 이끈 혐오는 음악이 가진 고유의 힘이 아닌 그 힘을 사용한 권력에 근거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지휘자 시몬 락스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쓴 ‘다른 세상의 음악’(1948)을 뒤늦게 읽고 자신의 ‘세상의 모든 아침’과 상반된 음악적 현실을 발견한 것이다. “음악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장르”임을 폭로한 이 저서는 나치가 음악이란 장르를 통해 어떤 정신적 폭력을 행사했는지 여실히 고발한다.

가장 충격적인 묘사는 수용소 병실 앞에서 동료 유대인 음악가들에게 연주를 강요한 장면이다. 일견 병문안 콘서트처럼 보일지 모르는 이들의 연주는 환자들에게는 다음날 가스실행을 암시하는 사전통보였다. 연주가 끝난 뒤 병상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동료들을 목격한 환자들은 동료들이 찾아와서 연주를 할 때마다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샤워실로 가장한 가스실에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던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곧 쳐들어갈 다음 영토에 군대보다 먼저 베를린 필하모닉을 보내 콘서트를 가진 나치의 전략 또한 이와 유사하다. 2차 대전 당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이끄는 베를린 필은 그래서 유럽 각 도시에서 죽음의 전령사로 악명이 높았다. 폭력과 야합한 음악의 사용으로, 음악은 강력한 호소력을 발하는 동시에 혐오감을 유발하는 것이 되었다고 키냐르는 이 책에서 고발한다.

사실 키냐르가 인지한 음악의 힘은 이미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영혼을 지배하고 최면을 걸어 인간이길 포기하는’ 음악의 힘을 위험한 무기라 정의하며 윤리적 책임을 반드시 인식하고 행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촛불광장에서 울려퍼진 연주와 세월호 음악회, 그리고 최근 작곡가의 예술적 복권을 위해 다각적으로 개최되는 윤이상 음악회는 그래서 위로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무기를 가진 자가 적어도 우리 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기에. 음악은 양날의 칼이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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