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박재찬] 벼랑 끝 인생의 선물



‘벼랑 끝 인생의 역전 이야기’ 지난 6월말 존 로스(1842∼1915) 선교사의 사역 현장을 둘러보면서 나름 지어본 답사기 제목이다. 130년 전 로스가 중국 땅에서 한글로 성경을 번역·출판·배포하는 일련의 과정속엔 몇몇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겐 ‘벼랑 끝에 선 이들’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이응찬. 평안도 의주 사람인 그는 소가죽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다 큰 풍랑을 만난다. 배가 뒤집혀 가진 걸 모두 잃고 목숨만 달랑 건진다. 1876년 봄 그는 중국 단둥 펑청에 있는 고려문에서 로스를 만난다. 무일푼의 이응찬은 로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어학 교사가 된다. 이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역에도 동참한다. 최초의 한글 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 석 자가 이응찬이다. 쫄딱 망한 소가죽 장수의 이름이 1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

#김청송. 로스 앞에 등장한 또 다른 벼랑 끝 인생의 주인공이다.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으로 유명한 지안 출신인 그는 ‘영신환’이라는 약을 파는 매약 행상이었다. 그 역시 가진 것 하나 없는 처지에서 로스를 찾아왔다. 1881년쯤이었다. 로스가 선교보고서에 남긴 김청송에 대한 기록 일부다.

‘그는 거지로 찾아왔다. 약도 돈도 다 떨어졌고 여관비도 없었다. 그렇게 가망 없는 자는 본 적이 없다.’ 그런 김청송을 로스는 끌어안는다. 그리고 번역을 마친 한글 성경의 인쇄를 준비하던 차에 식자공(활자를 원고대로 조판하는 사람)으로 그를 고용한다.

김청송은 말이 어눌하고 이해력도 느렸다. 손재주도 없고, 행동까지 굼떴다. 하지만 누구보다 꼼꼼했다. 누가복음 글자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심어 넣었다. 누가복음이 발간될 무렵, 그는 로스를 찾아가 속마음을 전한다. “세례를 받고 싶습니다.” 성경 활자를 새겨 넣으면서 김청송은 그의 마음판에 복음을 함께 심은 것이다. 이후 김청송은 서른 곳 가까운 서간도 한인촌을 돌며 복음을 전한다.

#서상륜. 부모를 일찍 여읜 그는 홍삼을 팔아 연명했다. 1878년 어느 날 동생과 함께 홍삼을 팔러 중국의 항구도시 잉커우에 들렀다가 장티푸스에 걸린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가 세운 현지 병원에 입원한다.

로스의 동료인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복음도 함께 전한다. 그 섬김에 감동한 서상륜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도 받는다. 이후 그는 한국인 최초의 권서인(勸書人)으로 활동하면서 한반도 땅에 성경을 전한다. 성경을 들여오다 붙잡혀 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복음 전령사의 삶을 꿋꿋하게 이어갔다.홍삼 팔러 왔다가 성경 파는 인생으로 뒤바뀐 것이다.

벼랑 끝에 섰던 이들 장사꾼이 로스와 함께 만든 성경은 누구에게 건네졌는가. 다름 아닌 벼랑 끝에 선 조선의 민초들이었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한 한반도는 안팎으로 혼란함 그 자체였다. 민초들의 삶은 피폐했다. 믿을 구석이 없던 삶에서 성경과 더불어 선교사들을 통한 복음이 전해지면서 열매를 맺는다. 사람들은 믿음이란 걸 알기 시작했고, 소망을 품었고, 사랑을 실천했다. 그 복음은 지금 이 순간도 곳곳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열매를 맺고 있다.

답사 현장에서 로스와 이응찬이 처음 만났던 펑청의 고려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김청송이 세례를 받고 전도하기 위해 성경 봇짐을 지고 누볐던 지안의 한인촌과 교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상륜이 몸져 누워있던 잉커우의 선교사 병원 위치도 추측만 가능할 뿐이었다.

확실하게 건져 올린 사실도 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복음서를 처음 받아든 과정 속엔 보잘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인생들이 ‘메신저’로 쓰임 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전해진 복음이 지금 이 시대의 민초들과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도 여전히 위안과 소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한글 신약 성경 ‘예수셩교젼셔’ 출판 130주년을 맞아 드는 생각이다.

박재찬 종교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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