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페루, 쿠스코, 마추픽추 가는 길

황주리 그림


고대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가보기 전엔 그 유명한 공중도시 ‘마추픽추’로 가는 길에 들르는 도시 이름이려니 했다. 3399미터의 고도에 도착하면 고도의 여행 경험이 없는 사람은 숨이 조금쯤 가빠진다. 안데스 산맥의 능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광장의 분위기는 세상 어디와도 다른 독특함으로 여행객의 혼을 뺏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첫눈에 그 도시의 분위기에 매료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한 몇 년 세상모르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유혹이 온 마음을 휘감는다. 사실 그래도 그뿐인 것이다. 우리는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남이 뭐라 할까 눈치 보며 한순간도 마음대로 못한 채 온 생을 소모한다. 여행은 그 소모적인 일상 속의 일탈이다.

그 일탈의 유혹을 길게 누리고 싶었던 쿠스코에서의 짧은 여정은 아쉬웠다. 쿠스코는 고대 잉카제국의 지배자 ‘파차쿠텍’ 시대에 2400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와 안데스 산맥 곳곳에 연결된 수로, 계단식 밭들과 산꼭대기에 염전을 건설했던 놀라운 도시다. 1533년 스페인의 정복에 의해 400년에 걸친 잉카문명은 막을 내리고 많은 잉카 유적들이 사라졌고 그 위에 스페인 문명이 보태져 오늘날의 신비로운 여행도시 쿠스코로 남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수많은 원주민을 죽이고 태양의 신전 자리를 파괴한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무너진 잉카제국의 기반 위에 스페인식 건물들을 세우고 신전의 황금들을 다 훔쳐갔어도, 석벽과 돌길과 그 길 위에 서린 잉카문명의 지혜와 영혼의 힘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했다. 광장을 지나 루미요크 골목으로 돌아서는 순간, 13세기 잉카인들의 석공 기술의 정수인 ‘12각의 돌’을 만난다. 종이 한 장 낄 수 없고 지진에도 끄떡없다는 정교함 앞에서 마술의 힘을 느낀다. 쿠스코의 골목길은 이제껏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꿈을 선물한다. 내가 찾던 곳이 바로 여기야,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가슴 벅차오름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다시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두껍고 재미있는 책 같다고 할까? 여러 번 봐도 또 보고 싶은 한 편의 영화 같다고 할까? 쿠스코의 골목 안에서 나는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잉카식 돌길 위에 스페인풍의 집들이 늘어선 고풍스러운 골목들은 카페와 식당과 기념품 가게들로 술렁이지만, 나는 그 속에서 고대 잉카의 사라진 꿈을 보았다.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라진 꿈들은 내 꿈속으로 찾아와 속삭였다. 인간의 흔적이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없는 거라고. 골목의 분위기를 떠도는 잉카의 혼을 뒤따르며 골목을 헤매는 일은 행복했다. 왜 남미의 많은 문학작품들이 마술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쿠스코의 골목을 서성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밤골목을 가득 메우는 낯익은 안데스 음악 ‘엘 콘도 파사’ 가 광장 가득히 울려 퍼지고 산스크리스토발 교회언덕에서 야경을 감상하는 일도 쿠스코가 주는 행복한 선물 중 하나다. 서글픈 바람의 노래, 인디오들의 음악을 들으며 골목 바닥에 깔린 돌들과 광장의 기둥들이 어둠 속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풍경을 눈 속에 담는다. 문자가 없어서 남기지 못했던 사라진 잉카문명의 어느 영혼으로부터 오랜 시간 날아온 편지들이 마음속으로 도착한 것만 같다.

아르마스 광장에는 마추픽추로 떠나는 페루레일의 기차표를 판다. 쿠스코의 골목길을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 드디어 오랜 세월 꿈꾸던 신비로운 공중도시 마추픽추에 도달했다. 주위를 빙 둘러 높이 솟은 기암절벽들과 무성한 숲들은 공중도시의 고독과 신비를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했다. 고대 잉카제국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곳, 잉카 최후의 요새인 잃어버린 태양의 도시 마추픽추는 1911년 미국인 하이럼 빙엄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채 숨겨져 있었다. 스페인 군대에 의해 멸망한 마추픽추는 밀림에 가려 밑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볼 수 있다 하여 공중도시라 불린다. 문명의 패망과 저항이 고스란히 서린, 해발 2400미터 안데스 밀림 속 바위산에 남아 있는 공중도시 마추픽추에 안 가보고 죽는 일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적 차원의 문명 작품이라 불리는 마추픽추의 화려했던 도시는 이제 흔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 흔적에서조차 놀라운 잉카의 혼이 고고하게 서려 있다. 일만명 잉카인들이 살던 요새도시 마추픽추는 상상 속에 그려본 것보다 더 신비롭고 고고했다. 그곳에서 어떤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든 당신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혹시 나 자신도 모르고 있는, 세월에 묻혀 잃어버린 마추픽추 같은 영토가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 있지는 않을까? 내 마음속 꼭대기에 아무도 모르는 채 남아 있는 태양의 도시, 마추픽추여 영원하라.

황주리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